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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생 Aug 31. 2023

치매 엄마의 우당퉁탕 유쾌하고 개구진 하루[1]

치매 환자도 가족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지금 돌봐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

지금 돌봐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치매 14년 차 86세, 사랑하는 우리 엄마다. 엄마는 겁먹은 동공으로 방안을 천천히 훑어본 후 “여기가 어디냐” 첫마디를 내뱉으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엄마방이야 엄마방”이라고 하면 또다시 시선을 돌려 꼼꼼히 살핀다. 엄마 눈에 익숙해 보이는 물건을 발견하는 순간 그때부터 엄마는 편안해진다.

어제의 기억을 한 가닥 소환해서, 그 힘으로 침대에서 일어나고 더 많은 기억들을 끌어내다가 하루를 살고 잠들기를 반복한다. 


요즘 엄마는 풀 뽑기가 가장 큰 기억이다.

이맘때 봄비에 우후죽순으로 자라는 풀들이 씨를 맺기 전에 뽑아야 한다고 보이는 족족 지나치지 않고 주저앉아 뽑는다. 아파트 화단에. 산책 길 보도블록 사이에 삐쭉이 솟은, 주간보호센터 화분에 있는 화초까지 꽃이 피지 않은 서양난이 엄마 눈에는 풀로 보이는지 가리지 않는다.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엄마는 묘하게 잘 찾아내서 뽑는다. 무릎이 아파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팍팍한 땅에 자리한 풀은 안간힘을 다해 뽑으려다 엉덩방아를 찧으려 한 적도 여러 번. 


엄마 젊을 적 이맘때는 이른 새벽 한 술 뜨고 밭으로 논으로 나가서 논에 쟁기질하고 물 대고 다시 써레질하고 밭에 돌 고르고 땅 고르고 풀 뽑고. 지금은 멀칭비닐을 씌우고 고랑은 잡초 방지 부직포를 깔아 세상 좋은데 어디 그때는 그랬으랴. 풀보다 무서운 게 없을 논 밭이었을 터. 텃밭 농사를 지어보니 풀의 생명력을 실감한다. 뽑고 돌아서면 다시 솟아나는 것 같은 지긋지긋함에 넌더리가 날 정도다. 

빼곡히 올라오는 풀을 뽑고 헛 호미질로 작물에 바람도 쐬어주느라 해가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땅만 보았을 엄마의 젊은 시절 하루를 연상하게 된다. 


엄마의 풀 뽑기를 막을 재간은 없다. 막무가내로 온 힘으로 막아서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까딱 잘못하면 뼈 부러진다. 작년에 넘어져서 대퇴부 골절로 고생하지 않았느냐. 이제 넘어지면 엄마 장례 치를 때까지 침대 생활해야 한다”등등 어떤 말로도 설득할 수 없는 엄마의 일인 거다.

그 일을 해야 집에 있는 엄마 새끼 넷을 먹이고 가르칠 수 있었으니까. 누구보다 교육열이 높았던 내 부모는 간절히 바라셨다. 내 자식들까지 몸으로 먹고살게 할 수는 없다고.

덕분에 엄마 자식 넷 모두 머리 써서 밥벌이하며 잘 산다.


어느 순간, 그 시절로 돌아가 버린 엄마의 위대한 과업을 막을 수만은 없어 엄마 뒤를 따른다. 넘어지지 않게 바투 붙어 서서. 그리고 가끔은 도와드린다. 지독하게 안 뽑히는 풀은 몰래 꺾어서라도. 

또, 산책을 하다 보면 주인 없어 보이는 물건들, 엉뚱한 시간에 배출된 재활용 물품들, 하다못해 나뭇가지까지 모두 가져가자 한다. 이것도 엄마의 위대한 과업이려니 싶어 잠시 속인다. ‘물건이 너무 많으니 엄마 집에 모셔두고, 차로 한 번에 실어다 놓겠다고 하나도 빠짐없이’ 어차피 돌아서면 잊어버리시니 매번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기다. 언젠가는 이상했는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져오라 해서 식겁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거짓말로 넘겼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별난 분이라 “엄마 무거울 거 같아. 나 팔 아파. 이따 박서방보고 가져오라 할게”그럼 또 속는다. 순박하고 애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작년에 대퇴부 골절로 병원에 4달 동안 입원하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입원한 지 한 달 동안은 아예 면회가 금지되었고 재활병원에서 두 달, 요양병원에서 한 달은 재량껏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치매는 급격히 진행되어 평소 다니던 주간보호센터를 다시 이용할지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갈지 주간보호센터와 방문요양을 병행할지 고민이 많았다. 걸을 수 없는 상태인데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 자꾸 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요양병원에서 1대 1 간병으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입원하고 퇴원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물론 워커를 잡고 걷는 엄마의 모습을 눈물로 지켜본 다음날 퇴원 하고, 형제들은 그날 저녁 한자리에 모여 가족회의를 했다. 주간보호센터에 다시 나가되, 잠들기 전까지 방문요양을 신청하자. 그리고 상황이 안 좋아진 엄마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하지 말자 약속했다. 엄마의 엉뚱하고 황당하고 무리한 요구들에 대해 “그게 아니야 안돼”라든가, 찡그리는 표정, 큰소리는 절대 하지 말자고. 그리고 그 순간 무조건 엄마의 요구를 수용하자고 거짓말일지라도. 


작년 5월 21일에 수술하고 오빠집으로 다시 모신 9월 21일까지 4달 동안 우리 4남매는 엄마의 죽음을 미리 경험했다. 엄마가 우리 곁에 없을 때 어떤 마음인지를.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의 거짓말은 순항 중이다. 그동안 주보호자는 오빠에서 언니로 바뀌었고, 일주일에 두 번은 내가, 한 번은 동생이 한 번은 오빠가 엄마 곁을 지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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