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제빵기 하나가 나에게 남긴 것
누군가 당신에게 “고장이 났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답하셨을까요?
저는 순간 멈춘 듯했고 부서진 것처럼 들렸고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거 같았어요.
잔인함이란 이런 걸까?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내 안의 나는 " 아니야! 단지, 잠시 멈춘 것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어요..
나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중고마켓에 올라온 제빵기 하나를 데려오기 위해 기대감으로 기꺼이 버스와 지하철 환승, 또 한참을 걸어 금정산 끝자락까지 와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그것은 고장 난 기계로
멈춰 선 시간과 잊힌 기억이 담긴 조각이 되어 나를 찾아온 것이었어요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해요. 만약 당신이 고장 난 라디오가 된다면,
채널을 돌리고, 다시 전원을 눌러볼 거라고.
한때 따뜻한 음악을 들려주던 당신이었으니까요.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한참을 올라 도착한 곳은 금정산 끝자락의 한마을이었다
무더운 여름, 골짜기를 지나 마을까지 걸어가는 길이 유독 길었다.
'너무 무더우면 이 산골짜기에 매미소리도 없을 수 있는 건가?'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이 길엔 근처 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울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땀이 등에 고여있었다. 좀처럼 앉아 쉴 그늘도 의자도 없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급격한 계단식으로 이어진 지붕들만 햇빛에 반짝이고 그 앞으로 금정구 동래구가 한눈에 펼쳐진다. 맞은편 위로는 그늘이 보이나 가파른 숲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중고 제빵기 하나 받으러 내가 이 높은 곳까지 왔다니.... '
약속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도 판매자는 도착하지 않는다.
오던 길에 봤던 편의점으로 내려갔다.
'괜찮아. 이왕 여기까지 왔는 김에 아이스커피나 사서 테크에 앉아 멋진 금정산 자락과 저 아래 부산정경도 구경해 보고 가는 거지!' 하지만 이 호사스러운 계획은 아쉽게도 더위로 바로 포기한다. "하... 이 높은 산중에 바람도 한점 없다니! 세상에! 구경은 다음에... " 깊은 한숨을 쉬며 망설이다 좁은 편의점 안으로 다시 들어가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기꺼이 허락해 준 배려에 식욕은 없으나 보름달빵을 집어 들고 계산을 했다. 좁지만 시원한 편의점에서 서서라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참 다행이었다.
한참을 지나 약속시간보다 30분이 지났을까? 판매자로부터 거의 다 왔다며 옆 골목으로 나오라는 메시지 알람이 울린다. 이 무더위에도 지휘자 같은 복장에 곱슬 단발머리한 중년남자분이 한 손에 박스를 잡고 매우 경사진 오르막길을 올라오고 있다. 제법 큰 박스를 선뜻 건네받자 미처 잘 보지 못했던 비닐을 덮고 있던 먼지가 내손에 가득 묻어난다. 비닐로 잘 포장된 듯 하지만 세월에 너덜 해져 약간 찢어진 박스틈으로 기계 일부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최대한 표정을 숨기고 밝게 묻는다 "작동은 잘하는 거 맞지요?" 판매자분은 태연하기도 하고 잠시 수초 간에 정적 후 표정 없이 "이제 사용 잘 안 해서 몇 년 전 박스에 보관해 둔 건데"라 하시는데 내 맘은 어딘가 금이 가고 있다. 버스 정류장까지 돌아가는 길, 박스가 제법 커 수시로 두 팔로 가슴 위로 힘껏 감싸 안아 올려야만 다리에 걸리지 않아 걸음을 방해하지 않는다. 블라우스와 바지가 먼지로 더러워지고 짧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흰 팔은 박스에 생체기가 나 아려온다. 얼마 걷지도 못했는데 너무 힘들다.
순간 “지금이라도 내려놓고 그냥 돌아갈까?”고민을 했지만 무겁고 큰 박스가 힘겨워 내려놓기를 반복 후에도 최선을 다해 가슴에 앉고 불편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드디어 길거리엔 하교하는 아이들 소리와 픽업하러 온 차량과 학부모, 때때로 장을 보러 갈 것 같은 차림을 한 중년 아주머니도 모습을 드러내고 , 평소라면 이 시간 보긴 힘든 10대 남학생도 보인다. 드디어 저 앞에 버스정류장도 있다. 얼마 후 버스가 기꺼이 우리 세명을 태우려 정차했다. 큰 짐을 앉고 승차 후 좌석에 옆으로 이상한 자세로 앉아 짐을 잡고 있으니 , 기사 아저씨는 선글라스 넘어 힐끔 보시며 "무엇인데 그렇게 크냐"며 묻기만 하고 이내 바로 라디오 트로트 노래에 맞춰 흥얼대신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귀한 금정산 산자락풍경은 삶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싶었지만, 더러워질 게 분명했기에 먼저 박스를 열었다. 겉은 예상보다 깔끔했지만 뚜껑을 열자 갈색 부스러기가 가득했다. 먼지를 털어내며 “빨리 정리하고 빵을 구워 먹자”는 기대에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 제빵기는 작동하지 않는다.
전원을 꽂아도, 버튼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 설명서를 펼쳐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다시 그 제빵기를 먼지 묻은 박스에 담는다. 이후 환불은 불가능했고, 수리도 막막하다.
그날 이후 몇 달이 지났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제빵기가 내 작은 방 한편을 차지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유독 눈에 띈다.
고생하며 가져왔던 기억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오늘 저녁은 꽤 선선한 바람이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보름달이 너무 청명하고 밝다. 얼마 만에 보는 보름달인가? 토끼가 보일까? 한참을 감성에 젖어 스마트 폰으로 달을 찍으며 행복했다. 오늘은 참 운수 좋은 날인 가봐.
다시 제빵기에 눈이 멈춘다. 혹시라도 고쳐 쓸 사람 있을까 싶어 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올려봤지만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던 녀석이다.
이제는 무료 수거함 앞에 둘까, 아니면 끝까지 고쳐 쓸까 고민 중이다. 하지만 택배비, 최소 수리견적비로는 답이 없다.
제빵기의 외관은 여전히 말끔하다.
마치 이 물건을 팔았던 판매자의 깔끔한 겉모습처럼 말이다.
그가 왜 환불을 거절했을까?, 이 기계는 언제부터 왜 작동하지 않았을까?
이 물건의 지난 시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건 돌아가신 누군가의 물건일까?
그가 남긴 흔적을 없애고 싶었던 건 아닐까?
누구든 선택을 하게 된다.
고장 난 물건을 고쳐 쓸지, 버릴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넘길지.
하지만 어떤 물건엔 추억이 있고, 그 추억은 누군가에게는 오늘을 살아가게도 하고, 또 오늘을 정리하게도 만든다. 나는 지금, 그 낡은 제빵기 하나를 통해 이 낡고도 오래된 감정을 천천히 정리해보려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고장이 났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단순한 물질적 객관적 상태만을 말할 수도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이 멈춘 듯한 감정, 쓰임을 잃고 방치된 마음,
아니면 한때 뜨겁게 움직이다가 멈춰버린 삶의 한 순간 일수도 있다. 우린 새 물건처럼 늘 완벽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가 없다. 일부 고장 날 수도 있고 불편하지만 익숙해지기도 하고, 바래진 물건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가 곁에 두고 가장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은 변하는 기능과 생명, 멈춰 선 감정, 방치된 마음, 식은 사랑에도 다시 살아나고 다시 걷기 위한 사랑의 온도 일 것이다.
나는 아직, 이 낡은 제빵기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기억이 담겨 있을지 모를 이 물건처럼,
나도, 우리도, 어딘가에 다시 쓰일 자리가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