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 마고 앞에서 프랑스 와인의 역사를 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렌터카를 반납했다. 보르도까지는 기차를 이용하는데 테제베가 아니고, 일반 기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갈아타야 했다. 아비뇽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역이 크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아비뇽 거리를 다시 걸어볼까도 생각했는데 덥기도 하고 그냥 역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기차는 지정석은 아니었지만 자리가 있었다. 프랑스에서 장거리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기차는 해변을 끼고 달렸다. 한참을 지나도록 지중해 해변들이 보이고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보르도로 가는 길답게 바깥에는 포도밭들이 간간이 보였다. 기차여행을 대비해 준비한 책을 읽으며 보내는 여섯 시간은 그렇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르도에 도착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어 기념사진을 찍고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기차역에서 멀지 않아 걸어가기로 했다. 구도심이라 그런지 주변 건물들은 마치 패가를 연상케 했다. 재개발을 기다리는 듯한 광경이어서 약간 걱정은 되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신식 건물에 깨끗한 편이었다. 보르도답게 로비에 있는 의자는 오크통 모양이었다. 짐을 풀고 저녁 먹으러 나갔다. 나가다 보니 호텔 야외에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장소와 테이블이 있었다. 우리는 니스에서 경험을 살려 직접 요리해 먹기로 했다. 요리담당은 나였고, 메뉴는 잠봉 샐러드였다. 근처에 있는 까르프에서 재료를 사고, 음식과 어울릴 만한 알자스 와인을 한 병 샀다. 음식도 와인도, 분위기도 만족스러웠다. 2주 동안의 남프랑스 여행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 8시 반에 와이너리 투어가 예약돼 있어 우버택시를 불렀다. 시내로 가는 길은 좁아서 일방통행이 많았다. 트럭이 짐을 내리고 있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운전사는 급해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시간이 빠듯해서 불안했다. 단체 투어인데 첫 만남부터 지각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확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는 잭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가이드와 텍사스에서 온 부부, 펜실베이니아에서 온 부부 합쳐 세 가족이 함께였다. 인사를 나누고 바로 출발했다. 우리는 아들의 통역을 통해 들어야 했다. 나에게는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잭이 운전하며 보르도 떼루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알고 있는 내용이라 대충은 들렸다. 첫 번째 방문지는 쌩떼밀리옹이었다. 가는 길에 폼므롤을 지나가면서 패투루스 와이너리를 소개했다. 메독 1등급 와인과 맞먹는 좋은 와인으로 유명한 와이너리다. 내려서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일행들이 있어 그냥 지나갔다. 아쉬웠다. 한국인 가이드였다면 잠깐 멈출 수 없냐고 요청했을 것이다. 쌩떼밀리옹은 아름다운 마을로 유네스코에 등록이 될 정도로 고풍스러운 모습을 자랑했다. 골목마다 와인 숍이 즐비했다. 우리는 첫 번째 방문지로 잭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와인 숍에 갔다. 다섯 개의 와인을 테이스팅 했다. 각자 제일 좋았던 와인을 선택해 순서를 매기고 의견을 교환했다. 미국 부부들은 와인을 구매했다. 미국으로 배송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음 방문지로는 슈방이라는 와이너리였다. 잭이 영국에서 와인 관련 일을 했고 프랑스 출신 와이프와 결혼해서 와인 투어 가이드가 됐다고 했다. 그래서 그와 친분이 있는 와이너리를 방문할 수 있었다. 포도밭을 설명해 주고 안으로 들어가 발효탱크와 숙성실을 보여주고 테이스팅을 하는 순서였다. 와인은 맛이 좋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묵직함이 오크통에 숙성되면서 부드럽게 녹아들어 섬세하고 깊은 여운을 남겼다. 테이스팅이 끝나고 점심을 거기서 먹었다. 포도밭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 잭이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현지에서 배달 받아 먹는 시스템이다.
다음으로 샤토 프리우리 리헨느 와이너리로 이동했다. 꽤 큰 와이너리였다. 마찬가지로 발효탱크와 저장실을 거쳐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까지 안내하고 테이스팅을 했다. 쇼뱅 와이너리보다는 개인적으로 맛이 좋았다. 막상 와이너리를 방문하니 그렇게 기대했던 것처럼 특별한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와이너리 투어였다. 미국부부들은 열심히 참여했다. 한 부부는 은퇴한 재혼 부부였고, 한 부부는 직장에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와인과 관련이 있어 온 것은 아니고 와인을 좋아하고 프랑스 여행을 왔으니 와이너리 투어를 신청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어 가이드를 선택하려 했으나 우리 일정에 맞는 투어는 이 여행사가 유일해서 대안이 없었다. 세계 모든 와인을 품는 바다와 같은 보르도, 그 현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마지막 와이너리는 샤토 시랑이었다. 이 와이너리는 특별하게 자체 보유하고 있는 와인 박물관이 있었다. 역사가 오래돼서 처음 시작한 조상님들이 모아놓은 각종 와인 관련 물건들을 전시하는 곳이었는데, 가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의미가 있었다.
잭은 공식 일정은 마쳤으나, 1등급 와이너리 샤토 마고를 밖에서 구경만 할 수 있도록 안내하겠다고 했다. 일 등급 와이너리들은 오픈을 하지 않는다. 오픈해서 홍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샤토 마고를 보자 그동안 그림에서 많이 봤던 와이너리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나타났다. 잘 진열된 포플러 나무를 지나 성처럼 기품 있고 변함없이 몇 백 년을 간직한 한 폭의 그림이 현실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잭은 전체 기념사진을 여기서 찍자고 했다. 여섯 시에 예정된 투어를 모두 마치고 잭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일행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저녁 먹을 식당을 찾았다.
가고 싶었던 이태리 식당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저녁을 늦게 먹는다. 물론 9시가 넘어야 어두워지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레스토랑들이 7시나 여덟 시에 문 여는 곳이 많았다. 우리는 배가 고파 오픈해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평점을 찾아보니 나쁘지 않아 거기서 먹기로 했다. 오리고기 다리를 낮은 불에 오랜 시간 익혀 매쉬 포테이토와 함께 나오는 요리를 시켰다. 가금류에 어울리는 가벼운 보르도산 레드와인도 한 병 곁들였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역시 프랑스다”라고 감탄했다. 국물이 먹고 싶어 프랑스 전통요리인 베이크 오니온 수프를 주문했다. 수프라지만 매인요리 크기로 나왔다. 가격도 매인 요리와 비슷했다. 큰 볼에 빵으로 덮인 오니온 수프는 옆테이블에 앉은 현지인들도 쳐다볼 정도로 먹음직스럽게 나왔다. 주인은 셰어 하겠냐고 스푼을 세 개 주었다. 너무 맛있었다. 호텔 프랜치 레스토랑에서 오니온 수프는 먹어보았지만 현지에서 직접 먹는 오니온 수프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시내 구경을 하다가 우버를 불러 숙소로 돌아왔다.
오전에 와인박물관에 가기로 돼 있어 택시를 불렀다. 와인박물관은 지롱드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와인 디캔터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외관이 웅장하고 멋있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보르도는 성지나 마찬가지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와 처음 보는 비다. 유럽은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땅이 척박하다. 그래서 포도가 자라는데 알맞은 토양이 되고, 그래서 보르도가 와인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와인에 대한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많은 자료들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영상들은 판매하면 구매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물론 팔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와인을 즐기는 장면들을 모아놓은 4분짜리 영상은 핸드폰에 녹화했다. 가상으로 풀코스 연회를 하는 식당이 있었는데, 누구나 체험이 가능해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인은 테이블에 빈병으로 세팅되어 있고, 음식은 영상으로 서빙된다. 재미있는 체험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점심 먹을 장소를 찾았다. 박물관에 식당이 있었으나 주변으로 나가 찾아보기로 했다. 밖에 나가니 바로 푸드코트처럼 형성된 식당들이 있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자리 잡기 어려웠다. 우선 무슨 음식이 있는지 둘러보기로 했다. 한참을 지나서야 겨우 앉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 왔으니 굴을 먹어 보고 싶어 굴을 한 접시 시키고 아들은 빠떼를, 집사람은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를 주문했다. 맛이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즐겁게 먹을 수 있었던 곳이다. 커피까지 마시고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갔다.
입장료에 와인 한잔씩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 쿠폰이 포함되어 있어 8층으로 갔다. 지롱드강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로 나갈 수가 있어 우리도 화이트 와인과 스위트 와인을 한잔씩 주문해 밖으로 나갔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지롱드 강을 바라보며 가족들에게 은퇴계획을 말했다. 정년보다 일 년 일찍 은퇴하고,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평소에도 지방에서 혼자 지내기 힘들면 조기 은퇴하라고 했던 터라 찬성했다. 아들도 적극 동의했다. 연어들의 회기본능처럼 남자들은 바깥 사람으로 살다가 은퇴 후 가정으로 돌아오려는 본능이 있나보다. 가정에서 내가 할 일을 찾아 보기로 했다. 내 안에 요리 실력이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하루 한 끼는 내가 해보려고 한다. 가족을 위한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동시에 잘하는 활기찬 신 중년의 삶을 기대하며 남프랑스 여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