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데우는 미역국.
바다를 품은 맛. 미역국.
생일 아침이면 여전히 나는 미역국을 끓인다. 큰 냄비에 미역을 불리고, 참기름에 볶아 소기를 넣고, 팔팔 끓이는 그 과정은 어릴 적 엄마의 손길을 그대로 닮았다. 서툰 손놀림으로 냄비를 지켜보며, 주방 가득 퍼지는 미역국 냄새가 나를 과거로 데려다준다. 엄마가 있던 부엌으로.
어릴 적 생일 아침은 꼭 엄마의 미역국으로 시작됐다. 잠결에 퍼지는 미역국 냄새는 알람보다 정확했고, 그 냄새를 따라 부엌으로 나가면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 우리 딸 생일이지? 축하해!” 하며 환하게 웃는 얼굴.
미역국은 늘 비슷한 맛이었지만, 그 안에는 늘 다른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떤 해에는 엄마의 기분 좋은 축하가, 어떤 해에는 눈가 촉촉한 근심이 스며 있었고, 또 어떤 해에는 조용한 사랑이 국물처럼 깊게 우러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미역국은 단순히 생일을 기념하는 음식만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난 날, 엄마가 흘린 땀방울과 진통의 고요한 시간, 숨죽인 기다림과 말 없는 기도가 국물 속에 천천히 스며든 사랑의 첫맛이었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서 처음으로 혼자 미역국을 끓였던 날이 기억난다. 생일을 맞아 스스로에게 챙겨준 한 끼였지만, 그 국물을 한 숟갈 떠먹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계셔도, 곁에 안 계셔도 미역국은 눈물 나는 음식이었다. 생일이란 그저 축하받는 날만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 위에 함께 서 있는 날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어린 나이에 일찍 가정이 생긴 어느 날 엄마가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볕뉘야? 생일날은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가족,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네가 함께 고생한 날이야. 너를 낳고 먹은 첫 음식이 미역국이지. 미역은 바다에서 태어났다. 흔들리고 휘청이면서도, 깊은 바닷속에서 자리를 잡아. 이런 미역국은 한참 끓여야 제맛이 나듯, 우리 삶도 그렇게 끓여야 깊어지는 거야.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그 모든 시간이 어우러져야 국물처럼 진해진다.
이 와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바닷속에 미역처럼 중심을 잘 잡고 사는 거야.
알았지? 엄마 말 꼭 기억해야 해. 넌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세상을 살면서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는 꼭 미역국을 끓여 먹으면서 네 안에 부모가 있고, 가족이 함께 있다는 그것을 잊지 마.”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을 곱씹어 삼킨다. 인생은 생각보다 자주 식는다. 마음이 삭막해지고, 사람에 지치고, 나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많다. 그런 날엔 어김없이 미역국을 끓인다. 마음이 꺼질 때, 다시 불을 지펴 주는 음식이고, 위로가 되는 국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늘 그렇게 하셨고, 나는 그런 엄마의 국물 속에서 다시 마음을 데우며 살아왔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미역국을 끓인다. 나를 낳아준 엄마의 사랑을 기억하고, 나 역시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가는 하루를 다정히 맞이하기 위해 국물 한 숟갈에 담긴 시간과 마음을 되새기며, 이 삶이 결코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는 걸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생일은 단지 혼자만의 기쁨으로 이루어진 날은 아니다. 나를 있게 해 준 사람들의 날이고, 내가 다시 사랑을 건네는 날이다. 그렇게 미역국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삶을 되돌아보고 사랑을 되새기는 의식 같은 것이다.
한 그릇의 미역국에 담긴 삶의 의미를 나는 오늘도 조용히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