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절의 시간 속에 함께 한 사람들께
2025년이 엊그제 막 시작된 듯한데, 어느새 12월의 문턱을 지나가고 있다. 한 해가 이렇게 빠르게 흘러간 적이 또 있었나 싶다. 그러나 속도와는 별개로, 올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또렷하게 기억될 한 해다. 반짝이는 나의 계절이 세상에 나왔고, 그와 함께 ‘볕뉘’라는 이름이 내게 생겼다. 이름 하나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오래된 꿈에 불을 붙이는 순간이 있다는 걸 나는 올해 비로소 알았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책으로 사람을 만나는 시간들은 때로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때로는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만큼 거대했다. 마음서재 출판사를 차리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믿는 문장이 누군가에게도 길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품었다. 담은 작가님, 마림 작가님과 계약하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깊고 따뜻한 작업인지 알게 되었다. 브런치 작가님들과 공저를 준비하는 시간은 올해의 가장 섬세하고 반짝이는 장면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기꺼이 내어놓으며 한 권을 향해 함께 걷는 과정은,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고요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올해가 온통 피어나는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으로 둘러싸인 이 시간을 지나는 동안, 내 삶에서는 인연의 그림자가 천천히 멀어졌다. 아무 말도 없이 마음의 자리를 비우는 침묵을 바라보며 서운함에서 자책으로 그러다 포기로 변해 가는 나를 자책하며 떠오른 건, ‘아, 이 관계도 여기까지였구나’ 하는 시절인연을 배웠고 이해하게 되었다. 떠나가는 사람을 잡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상대뿐만 아니라 나의 상처나 상실도 컸기에 아팠던 시간을 다시는 되짚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떠난 사람이나 남겨진 사람 모두가 인연이 여기까지였기 때문인 것을.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딱 여기까지였기 때문이다. 관계란 얼굴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의 그 침묵은 초조와 불안을 가져왔지만 어느 순간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던 시간에서 일주일, 열흘, 한 달. 연락이 안되어도 이내 평온해졌다. 마음이 다시 예전처럼 잔잔한 물결이 되었다. 평정심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내 마음이 지금 평온하듯 그 사람 마음도 평온하길 그 계절 시간 내내 나는 최선을 다해 내 모든 것을 주었고, 준 만큼 후회나 미련도 없다. 다만 이 시절인연에서 배운 것은 앞으로 마음을 줄 때 꼭 상대방의 마음 깊이도 짚어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점이다. 나 또한 누군가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은 과연 나와의 계절 시간 속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그 시간에 꼭 한 가지는 배우는 것이 있었으면 한다. 떠나간 사람도 나와 같은 시간이었기를 아쉬움보다는 좀 더 곁에 있는 사람을 뒤돌아보고 마음을 헤아려 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진심으로 지금은 그저 아는 사람으로 응원한다. 삶이 조금 안온하길 바래본다.
반대로 뜻하지 않게 다가온 이름들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스며들듯 들어와 내 일상을 환하게 비춰 준 사람들, 그들의 존재는 내가 글을 쓰며 붙잡고 싶었던 ‘따뜻한 기척’ 그 자체였다. 어둠이 아니라 빛이었다. 에너지 소모가 아니라 에너지를 받는 한 줄기 볕뉘 같은 존재인 사람들 품에서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어쩜 관계의 흐름도, 인생의 변화도, 글쓰기의 여정도 결국 계절에 가깝다는 것이다.
피어오르고, 머물고, 사라지는 순간들은 모두 자연의 일이며,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것을. 한 해 동안 떠난 사람에게는 마음속에서 고요히 안녕을 건넸고, 내 삶으로 들어온 인연에게는 잠시 머물다 가더라도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마음의 힘을 길러야겠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관계의 신중함을 배우는 것 같다.
불만 있고 어두운 사람보다 단 한 걸음이라도 좀 더 밝음 쪽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품에서 사부작사부작 시간을 보내고 싶다. 햇살은 그런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드리워 한 줄기 따뜻함을 남기는 존재. 어둠에 싸여 있어도 끝내는 모습을 드러내는 따스함. 나는 필명처럼 누군가에게 볕뉘 같은 존재이고 싶다. 이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싶다.
2025년은 여전히 나를 흔들었고, 밀어 올렸고, 다시 세웠다.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인지, 어떤 마음으로 누군가의 글을 지켜주고 싶은지,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싶은지—그 모든 질문에 답을 찾아준 해였다.
2025년은 내 안의 오래된 문장을 흔들어 깨웠고, 새로운 이야기를 쓸 용기를 주었으며, 내가 누구인지 다시 정의하게 만든 해다. 선생님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건넨 한마디, 작가님들과 함께한 글의 여행. 떠나간 인연에게 건넨 조용한 안녕, 들어온 인연에게 내어준 따뜻한 자리—all of these moments—이 모든 순간이 나를 한 뼘 더 성장하게 했다.
이제 12월이라는 2025년 마지막 시간을 향해 달리며 나는 확신한다. 올해의 모든 계절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고, 다가올 시간 역시 또 다른 “나의 계절”이 되어 줄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