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내 가슴 저 밑바닥에 커다란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몇십 년 동안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어둠만이 가득한 정체 불명한 형이상학적인 동물이 살고 있다. 사람인 듯 사람이 아닌 동물인 듯 동물이 아닌. 죄책감과 자괴감이 똘똘 뭉쳐 지금의 나를 비웃는다. 나를 옥죄여온다. 지금까지 삶이 아닌 몽상적인 삶을 꿈꾸는 나. 어쩌면 이것이 불안의 시초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관통하고 생을 관통하며 추상적인 상상력만 가득한 체 운명과의 타협만 기다리고 있다.
샤워로 내 몸을 깨끗이 씻어내듯 지금의 생 또한 깨끗이 씻어내고 싶은 기분.
선택이란 끔찍한 기억을 잡고, 후회와 번민만이 가득한 감정.
이런 불안 뒤에 선택은 늘 따라다니는 양면의 동전과 같다.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불안이 친구처럼 붙어 있다.
선택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도 있지만, 그 문을 열면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이라는 바람이 불어온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바람이 부는 불안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것보다는 불안한 선택이라도 생을 관통하고 싶다.
선택의 순간. 마치 안개 낀 밤길을 걷는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희미한 불빛을 따라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내디딜 뿐이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후회라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어쩌면 선택이란 그 자체로 완벽한 해답이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결과에 대한 후회보다는, 그 순간 최선을 다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현재의 선택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때로는 용기 있게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과거를 놓아주어야 한다. 선택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불안한 나를 사랑하고 싶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불안의 나를 사랑하고 싶다.
사회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살지만 집안의 나는 진짜 나로 돌아온다. 친구들과 함께 할 때는 활발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조용히 책을 읽는다. 웃는 얼굴 뒤에는 슬픔을 감추고 있고, 겉으로는 강한 모습을 보여 주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한다.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남들은 나를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비관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다 보니 진정한 나를 잃어버릴 때가 많다.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 기준에 맞추려고 살다 보니 행복하지 않다.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지만 정작 내 꿈은 무엇인지 모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지만, 한번 익숙해지면 편안해한다.
어쩜 이런 모든 감정이 불안을 달고 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내면이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엇을 하던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왜 외부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고, 타인과의 소통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정작 중요한 것은 저 동굴 속 안의 나인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어쩜 나는 불안의 실체 모습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를 포장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안에 또 다른 동굴을 심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생을 뒤엎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불안이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불안이다. 추상적인 생각을 하는 내가 불안이다. 삶의 비밀은 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나를 불안으로 데려다 놓는다. 삶을 멍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속수무책 한 내 삶에 불안하다. 그런데도 이 불안을 달고 사는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옷을 갈아입듯 생을 마주하고 싶다. 지금의 이 글로 무엇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불안을 생각할 수 있는 나를 사랑하고 싶고 동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