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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Jan 04. 2022

정다운 ‘정포’

나의 대학시절은 참 엄혹했다. 학교 캠퍼스에는 사복형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어슬렁거린다. 학생들이 모여 있으면 괜히 기웃대며 ‘뭐 하나’ 감시한다. 형사들은 각자 다 맡은 구역과 담당이 있다. 단과대 학회, 서클, 총학생회 등으로 구분하고, 그 안에서도 감시하는 조직과 인물의 성격별로 나누어서 분담하여 마크를 한다. 담당 형사들은 각 학생조직의 대표들과 정기적인 면담을 요청하고 수시로 동향을 파악하며 정보를 수집한다.      


그런 정보과 형사들을 우리끼리 부르는 별칭이 있었다. 대놓고 부르지 않으니 좀 비하하려는 의도도 있고 장난기가 발동한 탓인데, ‘포졸’이라 불렀다. 대신 줄여서 형사의 성씨 뒤에 포졸의 ‘포’ 자를 붙여 부른다. 나를 담당했던 형사가 정 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정포’라 불렀다.   

   

나는 ‘오픈’ 서클장이어서 당담 형사와는 평소에 공개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에 데모가 일어나거나 하면, 난 아예 참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픈된 신분이라 바로 검거되기 때문이다. 대신 데모가 벌어지는 내내 담당 형사와 함께 한다. 일종의 ‘예검’(예비검속)인 셈이다. 데모 현장에 끼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는 것이다. 나도 데모가 있는 날은 의례 담당 형사와 지낼 작정을 한다. 데모가 잘 진행되는지 다치는 학생은 없는지, 현장에서 잡혀가는 후배들은 없는지 챙긴다. 물론 난 D-데이가 언제인지 어떤 택으로 진행될지 미리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할 뿐이고, 담당 형사도 내가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수시로 나를 찾아 낌새를 채려고 이것저것 찔러보곤 했다.      

“오늘 택이 뭐야?”

“몰라요~”

“지금까지 두 명 떴는데, 몇 명 더 나오나? 오늘, 고공도 있어?” 

“글쎄요~ 지켜보시면 다 알게 될 텐데요 뭘~”    

  

이렇게 정포와 노닥거리듯 주고받으며 데모 ‘관전’을 하곤 한다. 이럴 때 항상 함께 한 친구가 성모다. 성모는 대강당 서클 중 하나인 ‘인간걱정반’(인꺽)이라는 인문학 서클의 회장이었다. 이 친구는 3수를 해서 나이도 나보다 한두 살 많고 입씸이 좋은 친구였다. 그래서 정포와 얘기할 때도 절대 밀리지 않고 친구처럼 농담 따먹기도 잘했다. 이 친구는 한 때는 여의도에서 정치를 해볼까 잠시 간보다 일찌감치 손 떼고 목사가 되었다. 알코올 중독자들과 그룹 홈을 하며 자립을 돕는 일을 한다고 했다. 성모가 목사가 되다니, 그때도 지금도 참 믿기지 않는 일이다. 차라리 부흥목사를 하면 모를까... 학창 시절 그는 대단한 달변가에 선동가였다.      


1983년 9월 말인가 10월 초인가, 썰렁한 날씨에 창밖으로 어둠이 깔리는 무렵이었다. 나는 수갑을 차지 않은 채 정포와 마주 앉았다. 서대문 경찰서 취조실 어딘가였나?      

“밥은 잘 먹어?” 

“네, 아주 잘 먹어요. 밥맛이 죽여요”

“설렁탕만 말고 딴 거도 좀 시켜달라 그래~”

“네, 알겠어요”

......

......     


이렇게 시답지 않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눈치가 보이는지 정포는 뭘 주섬주섬 꺼내 주고는 잘 지내라 인사하고 서둘러 나간다. 내복이었다. 담당하던 학생이 주동으로 떴으니 상관 문책도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함께 지내며 정도 꽤 들었던 터라, 그도 심사가 명쾌하지 않고 뒤숭숭했을 거다.      


••

난 데모 주동 전에 약 6개월 동안 이른바 ‘도발이’를 치고 있었다. 4학년이 되고 신학기였으니 3월 언제인가, 옆 서클 후배가 이상한 우편물이 서클룸으로 와서 뜯어봤더니 양이 꽤 되는 문건이 들어있어서 바로 가져왔다고 하며 봉투 채 내어놓는다. 알았다, 두고 가라 하고는 살펴보니, ‘인식과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데 처음 보는 팸플릿이었다. 나중에 여유 있을 때 자세히 보려고, 우선은 안전한 미아리 집 가게 방에 있는 TV 밑에 봉투 채 숨겨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소식을 들은 친구 성모가 후배들과 엠티 가서 함께 읽겠다고 달래서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엠티 간 방이 털리고, 이 문건이 압수되었단다. 문제는 출처를 대라는 경찰 취조에 내 이름을 댔다는 거다. 아뿔싸!!      


아, ‘인전’은 국보인데, 그럼 기본 3년에 재수 없으면 7년인데... 아찔했다. 결론은 시간을 벌자, 도바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황급히 도바리를 결정하고, 6개월을 전전하며 살았다. 물론 비밀 연락망을 유지하며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신촌의 어느 한 골목의 ‘외나무다리’에서 그를 마주한다. 도바리 중이라 웬만해서는 학교 언저리에 얼씬거리지 않은 것이 원칙인데, 밤이라 괜찮겠지 방심을 한 것이다. 복지 다방에서 이화여대 쪽으로 넘어가는 작은 비탈 골목이다. 아마도 그 골목에 함경도집이 있었을 거다. D-데이를 알려주고 택을 전달하려고 골목 안쪽 후미진 술집에서 후배를 서둘러 만나고 문을 나서는데, 눈앞에 정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그는 혼자가 아니고, 일행 둘과 함께였다. 그런데 그는 취했다. 동행한 둘과는 부축인지 어깨동무인지 하고 있었고, 정포는 아무튼 많이 취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분명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순간, 매우 찰나였지만 ‘찰칵’ 사진이 찍히듯 정지했다가, 이내 내 시선은 가려던 길을 향해 미끄러지듯 갈리며 외면하게 되었다. 아찔했다. 아, 이제 끝이구나. 주동도 못하고 검거라니, 쪽 팔릴 생각 하니... 그러나 낭패감은 잠시고, 뒷덜미가 오싹했다. 거친 손들이 사납게 덮치듯 내 뒷목을 잡아 누르고, 두 팔을 잡아채며 뒤로 수갑을 채우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는 그냥 갔다. 그는 날 못 본 것처럼 외면하고, 가던 길을 그냥 비척거리며 갔다. 분명히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도 마주친 순간 흠칫했는데, 그냥 지나쳤다.      


왜 그냥 지나친 걸까? 나를 알아본다 한들 술이 너무 취해, 나를 체포할 수가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 그래도 난 혼자고 정포는 동행이 둘이나 더 있었는데, 나를 체포하지 못할 정도일까? 혹시 동행한 사람들은 경찰이 아니고, 그냥 친구라서 학생을 체포하는 모습을 보이기 꺼려서 그랬나? 나는 너무 의아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내 몸은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걸음은 걷고 있었지만 뜀박질보다 더 빠르게 걷고 있었다. 물론 당초 숙소로 가려던 길의 노선을 뒤죽박죽 바꾸어 한참을 돌고 돌아 숙소로 갔다. 혹시 정포가 뒤쫓아 오려나, 아님 다른 경찰이 꼬리를 잡고 미행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그 사건이 있고 얼마 있다가 나는 데모를 주동했고, 당시 보기 드물게 큰 싸움이 벌여져 치열하게 오랫동안 시위를 했다. 시위 주동자가 유인물을 뿌리고 몇 분 만에 사복경찰들에 의해 체포되어 바로 끝나버리는 경우도 많고, 좀 시간을 끌더라도 최루탄을 쏘아대며 진격하는 전경들이 상황을 장악하고 1시간 이내에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학생들의 참여도 많았고, 싸움도 치열하게 벌어져 오전에 시작한 시위가 오후까지 이어졌고, 백양로 대강당쯤에서 교문까지 밀고 밀리며 공방이 십여 차례 이어졌다. 나중에는 ‘백골단’ 수십 명이 투입되면서 상황은 종결되었는데, 나는 ‘불행히도’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다. 6개월 동안의 도바리 생활로 이미 많이 지쳤고, 이번에 안 잡히면 또 데모 주동을 한 번 더 해야 하니, 다시 도바리를 하면서 시위를 준비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 좀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잡히지 않을 걸 어쩌랴. 하는 수 없이 다른 학생들에 섞여 학교 후문으로 퇴로를 잡고 빠져나갔다. 후문으로 함께 밀려가던 학생들의 ‘저 사람 주동자 아니야’ 하는 눈길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들도 나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냥 걸어 내려갔다. 나에 대한 그들 나름의 배려였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복학생 하나가 뒤에서 따라오며, “오늘 참 대단했네요” 말을 건다. 나도 비슷하게 대꾸를 하며 함께 걸었다. 그런데 그는 뒷짐 진 손을 들어 올리며 “오다가 주었어요. 불발탄인가 봐요” 한다. 좀 이상했지만, 신기한 듯 들여다보며 터벅터벅 걸어 내려왔다. 후문에 거의 다 다다르자, 그 복학생은 돌변해서 내 팔을 잡아채더니 소리친다. “주동자다~!!!” 그러자 인근에 배치된 사복, 정복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든다. 순간 놀랐지만, 곧바로 평정심을 찾았다. “안 도망칠 테니까, 이 손 좀 놓으시오.” 이렇게 난 검거되었다. 나를 잡은 복학생, 아니 사복경찰에게 “오늘, 한 건 하셨네요” 웃어주고, 경찰차에 올라탔다.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고 처음 이틀 동안은 좀 특별한 ‘국보’급 취조를 받았다. 단순 집회시위 주동만이 아니라, 그보다 센 국가보안법 혐의를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집회시위는 정보 1과가 담당이고, 국보 사건은 정보 2과가 담당한다. 국보급 취조의 차원이 다르다. 무지 때린다. 아무튼 무사히(?), 별 혐의 없이 국보 취조를 통과하고, 이어서 가볍게 정보 1과 취조도 마쳤다. 그러고 나자 바로 정포가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일은 물어보지 않았다.      


•••

정포와의 인연은 그 후 몇 년이 더 지나, 또 한 차례 있었다. 그때도 역시 난 도바리  칠 때였다. 나는 데모 주동으로 당시 ‘정가(定價)’였던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1984년 봄에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는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이목을 의식한 외교적 필요로 ‘한국에 사상범이 없다’는 공언에 사실을 끼워 맞추느라 실제 시국사범들을 일괄로 석방조치를 했다. 물론 순순히 석방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석방되었고, 석방되자마자 선배가 운영하던 출판사에 입사해서 편집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사회과학 서적을 만들고, 저녁에는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내가 속해 있던 조직이 불온 조직으로 수사를 받고 많은 선후배, 동료들이 구속되고, 나머지는 일제히 다 튀었다. 나도 튀는 대열에 속했다. 이렇게 또 3년여의 고단한 도바리 생활에 접어들었다.      


87년 6월 항쟁의 열기가 아래부터 서서히 끓어오르는 있던 86년 여름날이었다. 후배와 함께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을 지나고 있었는데, 전경들이 터미널 주변에 쫙 깔려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을 일일이 검문하고 있었다. 당시 광주 5.18 관련 행사로 대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기로 되어있어서, 이를 사전에 막으려는 공안 당국의 예비 검속령이 떨어진 것이다. 물론 난 대학생은 아니지만 외관이야 대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검문을 당할 것이 분명했고, 그럼 꼼짝없이 수배자로 검거될 상황이었다. 순간 오만가지 시나리오가 다 떠올랐다. 더욱이 동행한 후배는 부모님 집에 경찰이 찾아왔었기도 해서 수배자 명단에 올랐음이 확실했고, 나는 다소 애매한 상황으로 알고 있었다. 순간 결단을 내렸다.      


나는 검문을 하는 쪽 반대편으로 냅다 뛰었다. 나 혼자 도망쳤다. 그러자 경찰 두어 명이 소리를 지르며 나를 쫓아 달려왔고, 5~60m 정도 달렸을까, 나는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며 길바닥을 굴렀다. 그 사이 후배는 유유히 사라지듯 빠져나갔다. 선배가 잡혀가는 마당에 유유히 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내가 튀기 전에 짠 약속이니 민첩하게 도망을 쳤을 거다. 내 나름의 계산에 따른 판단이었다. 나는 수배자로 검거될 확률이 반반이었고, 수배자가 거의 확실한 후배가 안전하게 튈 수 있는 틈을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그 후배가 지금은 나와 30년을 넘게 살고 있다.        


나는 곧바로 강남 어떤 파출소로 끌려가서 골방에 가둬졌다. 아마도 경찰관 숙직실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그 파출소에는 나 말고도 예비 검속된 대학생들이 많이 잡혀와 있었다. 경찰에게 주민번호와 이름 등의 신분을 대고 기다렸다. 수배자로 검거되든지 아님 훈방이든지 둘 중 하나인데, 그렇게 조바심이 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신원조회 결과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검거되는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우선 주머니에 있는 약속표 쪽지는 입에 넣어 다 씹어 삼키고, 활동계획 등을 적어둔 중요한 몇 장의 문서들은 짧은 기간에 다 씹어 먹기는 양이 너무 많았다. 중간중간 선명하여 바로 읽히는 필체나 ‘용공스런’ 단어가 적힌 부분들은 찢어내 틈틈이 씹으면서, 나머지는 그 방에 깔린 장판 밑에 슬쩍슬쩍 다 숨겼다. 하지만 문제는 복사해서 들고 있던 문건이었다. 양이 너무 많아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일명 ‘야비’라 불리던 야학 비판이라는 팸플릿이었다.      

그러던 중 순간, 뿅 하고 생각이 떠오른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을까, 절박하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까. “아저씨~ 아저씨”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래야 근무자가 들여다보러 올 테니까. “서대문경찰서에 내가 잘 아는 경찰이 있는데, 내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증해 줄 수 있다.” 이렇게 마치 빚이라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요구했다. 여기 잡혀있는 게 말도 안 되게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심정이 전해지도록 말이다. 형사 이름까지 대며 너무 자신 있게 요구를 하자, 그 근무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전화를 걸어, 뭐라 뭐라 몇 마디 하더니 수화기를 바꿔준다.      

“전데요, 창복이요. 아니 글쎄 길 가다가 검문에 걸려서 파출소에 잡혀왔어요. 회사에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놔주질 않네요”

“어? 아.... 그래?... 회사?”

“아 모르셨구나. 저 출판사에 다녀요” 

“어 그래, 알겠어. 잘 말해줄게, 바꿔 줘 봐”     


수화기를 전해 받은 근무자는 몇 마디 더 하더니 남은 한 손을 들어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휘저으며, 알겠으니 걱정 말라며 끊는다. 그러고는 짐짓 나에게로 와서는, “어디 가던 길이었냐? 왜 도망쳤냐? 손에 든 그 서류 뭐냐?” 취조 아닌 취조를 한다. “애인이랑 가던 중에 검문을 하길래 놀래서 그냥 피한 건데 막 쫓아오잖아요. 이건 출판사에서 기획하는 자료들이고요... ” 볼멘소리로 대답을 했다. 몇 마디 더 물었지만 형식적이었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속으론 살았다, 안도하며 누그러진 마음으로 고분고분 다 대답해주고는 바로 풀려났다. 정포는 이렇게 나를 두 번 구해주었다. 한 번은 모른 척해서 또 한 번은 아는 척해서.     


••••

정포는 키가 훤칠한 데다, 좀 마른 편이다. 그때 30대 중반 정도 되었으려나? 그러니까 나보다 대략 열두어 살 정도 위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숫기가 없었다. 그래서 멋쩍게 잘 웃었다. 순하고 착한 사람 같은데 어떻게 형사를 할까 싶을 정도였다. 형사 된 지 얼마 안 된 신참내기(신출내기)라 그런가?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참 자주 같이 지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만나고, 오다가다가도 만났다. 데모가 아니라 연고전을 해도 우리는 학교에서 같이 지냈다. 학교에 안 가면, 미아리 집으로까지 와서 같이 지냈다. 연고전이 끝나고 거리에서 데모가 이어지곤 했으니까. 그래서 연고전은 1학년 때 처음 가보고, 그 후론 못 가봤다.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정포가 보고 싶어 어찌어찌 수소문을 했더니 삼천포에 있다고 했다. 통화를 했더니, 삼천포 경찰서 기동대장이라고 했다. 내가 회사일로 근처에 갈 일이 있었는데 만나지는 못했다. 지금은 70 줄을 넘기고 얼추 노인이 되어있겠지만, 선한 인상은 그대로일 거 같다. 아니 선한 성품에 연륜이 쌓여 푸근한 노인이 되어있을 거 같다. 보고 싶다, 정포 형.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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