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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가방셔틀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가 있으면, 일찌감치 텔레비전 있는 집 애들하고 친해져야 한다. 미리미리 착실하게 공을 들여놔야 중계 당일 실수가 없다. 만일 당일 삐끗하기라도 하면, 역사적인 경기의 국민적인 응원 현장을 함께 하지 못하고, 골목으로 새 나오는 함성만으로 경기 상황을 짐작해야 하는,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싫은 낭패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효과가 직방인 것은 먹을 것을 가져다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 변변한 먹을거리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슈퍼에서 사다 줄 돈은 더더욱 없다. 좀 뻔하기는 하지만 아쉬운 대로 성의 표시 정도로는 쳐줄 수 있는 게, 학교에서 급식으로 매일 나눠주는 빵과 우유다.

   옥수수빵인데 두툼한 것이 제법 고소하니 맛있었고, 삼각뿔 모양의 비닐 곽에 담긴 하얀 서울우유는 당시 물정을 고려할 때 그리 하찮은 품목은 아니었다. 미련 없이 고스란히 바친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가져다 바친다. 하지만 이내 심드렁해진다. 저도 매일 받는 거고, 텔레비전이 있을 정도면 집에서 간식으로 먹는 것들의 수준이 있을 텐데, 이까짓 싱거운 빵과 우유가 특별히 눈에 찰 리가 없는 거다.


   좀 비굴하지만, 이때 쓸 만한 카드가 가방 들어주기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그 애 집 앞에 가서 가방을 받아서 든다. 이른바 요즘 용어로 ‘가방 셔틀’이란 것이다. 이러고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방 셔틀, 빵셔틀 다 했던 거다. 집 앞까지 가 기다리는 게 안 내키면 등하교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만나서 가방을 받아서 든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존심상 한심한 마음이 한 번 들면 여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김일 선수의 경기를 포기할 수도 없고 마음이 착잡해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비장의 무기가 있어서 이런 심란한 상황은 애초부터 겪을 일이 없었다. 텔레비전 있는 집 애들 누구라도 군말 없이 단번에 관람을 보장하는 결정적인 카드를 나는 가지고 있었다. 나에겐 딱지와 구슬이, 아니 작은형에게 있었다. 우리 집 옥상 장독 안에 들어차 있는 딱지와 구슬은 웬만큼 꺼내서는 표도 안 난다. 형한테는 “나 꺼내 간다.” 한마디만 던지면 된다. 작은형은 왜 가져가냐, 얼마만큼만 가져가라, 이런 거 일절 없다. 그러니 장독에 든 딱지와 구슬은 내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쪽 팔리네 어쩌네 구질한 생각 자체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텔레비전 있는 집 애가 더 반색하며 좀 더 달라는 둥 아쉬워하며 협상해온다. 내가 갑이 되어, 베풀 선심의 양을 타산한다. 당일 자기 옆에 앉게 해준다는 다짐 역시, 지가 알아서 먼저 내놓는다. 


   아마도 요즘 있는 집 애들의 심사가 이렇지 않을까, 문득 생각이 든다. 있는 집 애들이 공부 잘하는 것이야 이미 상식이 되어버렸다 치고, 있는 집 애들이 인물도 좋다는 말에는 마지못해 웃고 말지만, 있는 집 애들이 성격도 좋다는 말에는 무너지고 만다. 풍족한 환경에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생각 자체를 할 필요가 없으니, 그저 넉넉하고 평안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기만 하면 되니 뭘 해도 잘되는 것 아닐까. 그러고 보면, 그때 나도 나름 ‘있는 집’ 애들이었던 셈이다.


#미아리의추억 #텔레비전 #가방셔틀 #빵셔틀 #급식빵우유

류해윤_산수도-종이에 아크릴릭_47*4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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