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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한 아이를 키우는 온 마을

   한 아이가 크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는데, 나를 두고 한 말이 분명하다. 마을에 함께 살았던 이웃들이 나를 키우고 만들었다. 그 시절엔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부모들은 먹고 살기 바빴고, 애들은 학교 아니면 동네가 세계 그 자체였다. 그땐 동네가 늘 북적거렸고,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며 만나고 살갑게 지냈으니 말이다. 이중 유난히도 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동네 어른이 있다. 서경이 엄마와 형기 할아버지다.     

   서경이 엄마는 얼굴 생김새와 표정, 입은 옷, 걷는 뒷모습까지 그 분위기(아우라)가 각별한 아줌마였다. 그리고 내 마음속 어딘가 왠지 아련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서경이 엄마는 항상 한복을 입었다. 세탁소 올 때도 그랬고 앞 집 슈퍼에 콩나물이나 두부 사러 올 때도 그랬다. 하얀 저고리에 옅은 색의 치마를 입었고, 동전은 언제나 하얬고 푸른빛이 서렸다. 하얗고 동그란 작은 얼굴에 쪽진 머리였다. 큰소리로 말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조용히 웃으면서 상냥하게 말한다. 그런데 뭔가 범접하기 어렵고 또 부러움 같은 마음이 있었다. 아마도 교양 있고 세련된 사람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었을까? 

   서경이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먹은 누나다. 작은형 또래로 서너 살은 많았을 거다. 서경이 누나는 송기자네와 간진이가 사는 그 막달은 골목 끝 집에 살았는데, 큰길에서 자기 집이 있는 골목으로 바로 들어가 버리면 세탁소 쪽으로 잘 내려오지 않아 평소에 보거나 마주친 적이 없었다. 가끔 서경이 엄마와 서경이 누나가 양쪽 팔을 부축해서 조심스럽게 모시고 가는 할머니가 있었다. 서경이 엄마의 엄마라고 했는데, 서경이 엄마와 마찬가지로 치마저고리 차림에 쪽진 머리는 온통 하얬다. 모녀 3대 말고 다른 식구는 더 없었나보다. 

서경이 엄마는 날 좋아했다. 세탁소에 오기만 하면 나한데 말을 붙이고, 머리를 잘 쓰다듬어 주었다. 골목에서 만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먼발치에서도 꼭 나를 불렀다. 그런데 서경이 엄마는 나를 ‘돼지’라고 불렀다. 

   “돼지야, 우리 돼지 공부도 잘한다고? 이번에도 하나 빼고 다 수라며?” 

   나는 그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분명 나쁜 말로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나를 좋아해서 부르는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 돼지 소리가 너무 싫었다. 

   “아줌마는 니가 귀여워서 그러는 거 아이가?”

   “귀여운데 왜 돼지냐고?”

   서경이 엄마에 동조해 역성드는 엄마가 더 싫었다. 서경이 엄마가 세탁소로 들어오는 것 같으면 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도망쳤다. 그럼 또 서경이 엄마는 돼지를 부른다. 

   “우리 돼지 어디 가니?”

   언젠가 서경이 엄마가 부르는 돼지야 소리가 그리 노엽지 않게 되었을 무렵, 서경이 엄마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창백하고, 걸을 때도 조심조심 걷고, 조용조용 말하는 것도, 아줌마가 힘이 없고 몸이 아파서 그랬구나 싶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서경이 누나네는 이사를 갔다. 그 후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왠지 서경이 엄마 하면, 난 밑도 끝도 없이 단편소설 <소나기>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떠올리곤 했다. 서경이 아줌마는 동네 다른 아줌마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아줌마는 파란 가을 하늘 위에 피어난 코스모스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운데, 애처롭고 아렸다.      


   형기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았다. 허리도 굽고 걸을 때 한 손은 뒷짐을 지고 한 손은 휘휘 저었는데, 아마도 중심을 잡으려고 그러나 했다. 슈퍼가게 일은 형기 형 엄마와 할머니가 도맡았기 때문에, 형기 할아버지는 할 일이 없어 보였다. 집에서 나오면 동네 한 바퀴 하고 큰길가 길목에 앉아서 자주 졸았다. 내가 윗동네에 놀러 가려고 큰길에 들어서면, 형기 할아버지는 예외 없이 검문하듯 버럭 했다. 

   “너, 어디 가냐?” 

   그 소리가 하도 커서 깜짝 놀라기도 한다. 마치 못 갈 데 몰래 가는 것 마냥, 이유를 대야 한다. 대답을 해도, 누구네 가냐? 왜 가냐?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이 이어진다. 어느 날 큰집에 엄마 심부름을 가려고 큰길에 섰다. 역시 버럭 했다.

   “너, 어디 가냐?” 

   “엄마 심부름이요.” 

   “어디로?” 

   “큰엄마네 집이요” 

   “큰엄마 집이 어딘데?” 

   “저기 월곡동이요” 

   난 주저 없이 호기롭게 답했고, 거침없는 대답에 무사통과했다. 그 후론 큰길앞 내 암호명은 ‘큰엄마네 집’이었고, 그럼 바로 통과였다. 형기 할아버지와의 악연이 하나 있다. 3학년 때였다. 골목에서 마주친 할아버지는 다짜고짜 따지듯 퉁명하게 묻는다. 

   “너 이빨 잘 닦고 다니냐?” 

   “네??” 

   “이빨 잘 닦냐고, 니 입에서 똥내 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더욱이 그 질문이 추궁하는 바가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당황스럽고 창피했다. 이를 잘 닦으라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몇 번 듣기는 했지만 그걸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렇다고 똥내가 날 정도는 아닌데 마치 이를 아예 안 닦고 다니는 것처럼 말하니까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난 할아버지로부터 빨리 벗어나려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내빼듯 지나쳤다. 그날 저녁 양치질을 엄청 오랫동안 박박 했다. 

   “너 웬일이냐? 고만해라 이빨 닳겠다” 

   영문을 모르는 엄마가 의아해할 정도로 싹싹 닦았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하루 종일 있어도 몇 마디 안 한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 집에 뵈러가도, ‘왔나’, ‘밥묵자’, ‘가봐라’ 세 마디면 할 말은 다 한 거였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늦가을이었다. 아버지가 동네 조무래기들 몇 놈을 세탁소 앞에 붙들어 놓고는 뭐라 뭐라 하는데, 타이르는지 나무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얘들도 뭐라 변명을 하는지 아버지와 댓거리를 주고받는다. 그러더니 해결이 났는지, 애들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듯 뿔뿔이 후다닥 가게문 밖으로 달아난다. 

   아버지에게 다가가 물으니, 애들이 양말을 안 신고 있어서 집에 가서 양말 신고 와서 놀아라 했다는 거였다. 나도 몰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먼발치서 보기에 뭔가 사뭇 심각한 일로 애들과 이야기가 오간 줄 알고 궁금했건만. 아버지도 딴 애들한테는 동네 아저씨였다. 세상 무뚝뚝한 양반이 동네 애들을 챙기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동네에서, 이렇게 동네 어른들의 시선 속에서 안전하게 커갔으리라..     


#미아리의추억 #동네어른 #마을 

류해윤_장기_종이 위에 아크릴릭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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