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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태권 소년

   국민학교 4학년 때에 학교에서 방과후 프로그램으로 태권도를 처음 시작했다. 작은 체구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가무잡잡한 얼굴의 사범님, 하얀 도복을 입고 두툼하고 굵직한 검은 띠를 허리에 두 겹으로 두르고, 헙! 헙! 딱딱 끊어지게 기합을 내지르는 사범님의 모습에 나는 바로 반해버렸다. 특히 검은 띠 양 끝 쪽에 노란색 실로 한자 이름을 새겼는데 정말 폼났다. 나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참여했으니까 창단멤버였던 셈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범님은 우리 세탁소 위 큰길가에서 따로 태권도 도장을 운영했는데, 처음 도장을 열면서 단원 모집 홍보를 위해, 먼저 가까운 국민학교에 거의 무료에 가까운 프로그램을 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 한쪽에서 신주머니 비슷한 도복 가방에서 도복을 꺼내 갈아입고, 입고 있던 옷은 그대로 땅 위에 잘 추슬러 모아둔다. 도복을 입고 띠를 허리에 두 번 두르고 매듭을 지으면, 띠 양 끝이 같은 길이로 수평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이게 처음엔 쉽지 않아 여러 번 고쳐 매곤 했다. 운동장 한가운데 놓여있는 구령대 앞에 정해진 간격으로 열과 오를 지어 집결하면, 그때야 사범님이 구령대에 올라와 인사를 하고 수련이 시작된다. 사범님이 먼저 직접 두어 번 시범을 보여주고 나서 구령을 외치면 우리는 그대로 따라 했다. 이때 보조 사범님들은 우리 사이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개별적으로 자세를 고쳐주었다. 하루 1시간씩 품새를 배우고, 끝날 무렵에는 몇 명씩 불러내 대련시켰다.

   나는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소질이 있었는지 사범님 눈에 바로 들었고, 매월 치러지는 승급 심사에서 한 단계 건너뛰는 특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 달을 재미나게 같이 수련하던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다. 이상해서 물어보았더니 자랑 섞인 표정으로 으스댔다.

   “나 이제 도장 다녀.”

   “도장? 도장이 뭐야?”

   난 그때 태권도 도장이 따로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거기선 운동장이 아니라 건물 안 실내에서 운동하고, 도장 천장에는 발차기를 할 수 있는 단단한 샌드백이 걸려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월회비가 비쌌다. 마치 낙오된 것 같은 약간의 상실감과 ‘지들만 가다니’ 배신감이 조금 들긴 했지만 별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난 이미 태권도부 주장이기 때문에 여길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정말 주장으로서 도리가 아니었으니까.     


   몇 달 후, 드디어 나도 도장에 갈 기회가 생겼다. 학교가 방학하면 태권도 수련도 방학 동안 중단하게 되는데, 방학 기간에 일주일 동안 도장에 가서 특별훈련을 했다. 여름방학 때는 모서(冒暑) 수련, 겨울방학 때는 모한(冒寒) 수련이라고 불렀다. 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장에서는 어떻게 수련하는지, 도장에 다니는 애들은 어떤 애들인지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 도장 애들 실력은 어떤지가 제일 궁금했다. 도장 애들한테 실력을 보여주고 기를 죽여 놔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주장으로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 그 반대였다. 우선 도장에는 중학생 형들이 많았다. 그중에 키도 어른처럼 크고 생기기도 잘생긴 형 하나가 단연 눈에 띄었다. 이름도 생생하다. 이.병.기. 무려 검은 띠라니. 사범님들이나 매는 그 검은 띠를 그 형도 길게 늘어뜨려 매고 있었다. 게다가 띠 양 끝에는 역시 노란 색실로 한글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품새를 하는데 발차기 높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얼굴을 마치 마룻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리면서 다리는 하늘로 쫘악 뻗는데도 몸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몇 초 동안 그 상태로 정지해 있기도 했다. 도무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대련할 때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거의 애들과 어른이 대련하는 수준이었다.

   내 또래 애들, 특히 학교에서 같이 시작했다가 중간에 도장으로 가버린 애들의 실력은, 다행히 뭐 별거 없었다. 아니, 내가 훨씬 나았다. 그렇다고 그걸로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나보다 두세 살 정도밖에 많지 않은 중학생 형들인데, 실력이 이 정도라는 데에 일단 놀랐고, ‘이게 도장이어서 그렇구나!’라고 여겨지니 사실 맥이 좀 풀렸다. 학교에서 제일 잘하는 나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장 애들을 쫓아갈 수는 없나보다, 하는 일종의 절망 같은 것을 느꼈다. 모서수련 첫날부터 기가 죽긴 했지만, 그래도 남은 기간에 생전 처음으로 많은 땀을 흘리며 수련했다. 그리고 그 검은 띠 형과도 친해져서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런데 이런 나의 도장 ‘충격’을 사범님은 눈치챘는지 못 챘는지 알 수 없지만, 사범님은 나더러 도장에 다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개학하고 나는 다시 학교 운동장에서 열심히 수련했다. 어느덧 나도 빠짐없이 승급심사를 통과하여 검은 띠를 두르게 되었고, 후배들과 하급자 단원들을 가르치는 보조 사범 역할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권도를 그만두어야 하는 날벼락 같은 슬픈 일이 생겼다. 6학년이 되면서부터 심하게 뛰거나 힘을 많이 쓰면, 낭심 부위가 아팠다 말았다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통증이 잦아져서 병원엘 갔더니, 탈장이라는 병이란다. 증세가 그리 심한 것은 아니어서 간단한 수술로도 완치가 되지만, 내가 아직 어려서 수술은 나중에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수술 시에 마취하게 되면 성장기에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방과후 태권도를 그만두었다. 체육 시간에도 애들 다 나가고 없는 텅 빈 교실을 지키거나, 나가서도 가만히 앉아 애들 노는 것 쳐다만 보고 있었다. 질긴 고무로 만들어진 ‘탈장기’라는 의료기기를 엉덩이 위치에 항상 감고 다녀야 했는데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여름에는 고무에 살이 짓무르고, 또 고무를 연결하는 금속으로 된 부속이 수시로 살을 씹어 엉덩이에서 항시 피가 났다. 고1 겨울방학 때 수술할 때까지 만 3년을 넘게 그렇게 지냈다. 잠시도 가만 안 있고 종일 뛰어놀고, 운동을 좋아하던 태권도부 주장이 중학교 3년 내내 체육 시간에 교실에만 앉아 있었으니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실기 점수를 얻을 수 없어 필기시험으로만 점수를 따야 하니, 만점을 받아도 70점이었다. 억울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사범님도 무척 아쉬워하셨다. 강남의 말죽거리에 처음 설립된 국기원에서 열리는 시합을 앞두고 유망주 하나를 포기해야 하니 속상하셨을 거다. 

   사범님은 그 후에도 가끔 동네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웃어주고 “공부 잘하지?”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동네에서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엄마로부터 가끔 전해 듣는 소식에 따르면, 태권도 도장을 꾸준히 잘 운영해서 유치원으로 확장하여 원장이 되었고, 도장을 시작했던 그 길가에 건물까지 지었다고 했다. 20대 청년 시절에 미아리에 정착하여 동네의 유지가 되었다. 큰형의 조카 두 놈이 모두 사범님의 유치원을 다녔다. 그리고 언젠가 사범님이 중병에 걸려 투병 중인데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들었고, 결국 한창나이에 돌아가셨다.

   지금도 미아리에 갈 때면 가끔 그 큰길로 나가 건물 앞에 서본다. ‘나래유치원’이라고 쓰인 현판이 여전히 붙어있고, 건물 안에서 창 너머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때는 어른의 단호한 구령 소리에 이어 아이들이 합창으로 내지르는 기합 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미아리의추억 #태권소년 #국기원 #탈장 #방과후   

류해윤_씨름_종이 위에 아크릴릭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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