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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삼형제

   우리 삼 형제는 어쩌면 맏이와 중간, 그리고 막내의 전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큰형은 귀한 첫아들로 태어나 부모는 물론 집안 식구들의 축복 속에서 자랐다. 삼 형제 중에 유일하게 외동의 자리를 경험해서, 온갖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만큼 자존감도 높았을 테지만, 동생이 태어날 때마다 자신에게만 쏠리던 사랑과 관심이, 없는 집 뒤주에 쌀 없어지듯이 푹푹 줄어들자 상실감도 컸을 거다. 게다가 동생들의 본(本)이 되려면 의젓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린 나이에 부담이었다. 철이 들어서는 아버지가 쓰러지자 희생과 헌신이 당연한 맏이의 임무라고 받아들였다. 엄마 역시 아버지 병간호에 정신을 빼앗겨 큰형 인생의 결정적인 시기를 그만 방치하고 말았다. 엄마는 큰형을 통해 자식 농사의 중대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교훈을 새길 수 있었다.     


   작은형은 역시 달랐다. 작은형은 쫑알대는 나와는 달리 말이 많지 않았다. 과묵했달까, 아니 뚱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 골난 애처럼 항상 누구에게나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나한테만은 예외적으로 그렇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큰형처럼 무섭다거나 날카롭지는 않았다.

   역시 둘째라서 그랬을까. 맏이는 맏이대로 막내는 막내대로 제 몫과 위치가 있어서 나름의 주목과 관심을 받는데, 작은형은 그사이에 끼여 별다른 주목도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더 내놓으라 하기도 여의찮은 위치임을 수긍하느라 그랬을까. 겉으로는 별로 대항하지 않는 무던한 애로 보여도, 그 안에서는 눌러 삭이려는 마음과 빛을 보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본인도 이해되지 않는 복잡하고 상충하는 감정들이 들고났을 텐데도 그저 과묵하고 뚱한 애라는 캐릭터로 덮어두고 있었을 뿐이다.

   본인을 드러낼 무기와 실력이 아직 마땅하지 않았을 동안에는 뾰루지처럼 일탈적인 행동이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불거졌지만, 작은형의 성취욕과 집중력은 대단했다. 어린 시절 작은형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못살게 구는 형이 있었는데, 아무 잘못도 없이 당한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몇 날 며칠을 가방 안에 돌을 잔뜩 넣고 다니면서, 일요일임에도 그 형이 사는 동네로까지 찾아가서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고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가방에 도시락을 넣어주려다가 우연히 돌을 발견한 엄마가 놀라서 캐묻고 타이르고 혼내서 겨우 돌들을 꺼내놓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 둘째, 작은형의 출구는 ‘그림그리기’였다.     


   나는 막내답게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 파악을 잘했다. 특히 엄마의 눈치를 잘 읽었고, 또 약게 처신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래야 몸집도 크고 힘도 센 형들 틈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막내라고 베풀어주는 너그러움을 최대한 활용하고, 눈치로 재빠르게 상황판단 잘해서 내 나름의 영토를 만들었다.

나는 밝고 명랑하고 활발한 아이였고, 욕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착하고 공부 잘하고 예의도 밝은 아이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 안 그러면 엄마가 속상해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 때문에 속상해하거나 실망하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엄마의 욕망을 가장 잘 파악했고 또 가장 잘 실천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의 평판을 항상 의식했고 또 예민했다.

   엄마는 두 형들을 키우며, 진학을 뒷바라지하면서 파악한 정보와 터득한 방법을 나에게 집약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두 형을 거치며 경험한 시행착오를 나는 물려받지 않아도 됐다. 엄마는 가장 효율적으로 집대성한 자식 농사의 기법을 고스란히 나에게 적용할 수 있었다. 나는 엄마의 서울살이 인생에서 엄마의 소망과 노력이 가장 잘 응집된 작품이었다. 


#미아리의추억 #삼형제 #막내 #맏이 #중간

국민학교 졸업날 찍은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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