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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큰형

   큰형은 참 무서웠다. 엄마 아버지는 물론 형들한테도 맞아본 적 없이 컸지만, 큰형은 그냥 무서웠다. 아니, 어려웠다. 아버지보다도 큰형이 더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막내인 나와 무려 일곱 살 터울이 진다. 말이 일곱 살이지 어린 시절 일곱 살 차이면 애와 아저씨 관계다. 열세 살 국민학생과 스무 살 대학생이 7살 차이니 말이다. 그래선지 큰형과 얽힌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별로 없고, 즐겁거나 신나는 기억은 더더욱 없는 것 같다.

   내가 국민학교 2, 3학년쯤 큰형에게 붙들려 단단히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당시 큰형은 중3이나 고1 정도 되었을 거다. 어쩌다 내가 멋을 부린다고 흘려 쓴 글씨를 형이 본 것이다. 혼을 낸다고 별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글씨를 왜 이렇게 흘려 쓰냐.” 한마디를 하는데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온다. 난 그저 그 눈빛에 얼어붙고 만다. 옆에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는데 글쎄, 어찌나 무안하던지 지금도 큰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 사단이 있고 나서 형은 나에게 펜글씨 공책을 한 권 주었다. 네모 칸에 희미한 점선으로 글자가 미리 쓰여 있어서, 그 점선을 따라 펜촉에 잉크를 찍어 그리듯 글씨를 써넣었다. 그다음 줄부터는 점선 글자의 도움 없이 그대로 따라 썼다. 매일 한 바닥씩 써서 큰형에게 검사를 맡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형은 성격이 참 곧았다. 대충이 없고, 얼렁뚱땅 같은 것은 아예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려웠다. 큰형은 작은형과는 정반대였다.   

  

   큰형은 국민학교 때 공부도 잘했고 열심히 했지만 가고 싶었던 삼선중학교 입시에서 떨어져 버렸다. 결국 2차로 한양중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는 공고를 갔다. 그때는 아버지가 죽네 사네 할 때였고, 엄마는 아버지 살린다고 혼이 빠져 살았을 때라 형에게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본인도 뭔가 도전하려 하기보다는, 맏이로서 빨리 취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게다가 삼선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한양중학교에 가는 바람에, 같은 학교 재단이었던 한양공고로 진학하도록 학교로부터도 권유받기도 했다.

   ‘공고’ 진학이 어쩌면 큰형의 인생을 일찌감치 결정해버린 것 아닐까 싶다. 동네의 동갑내기인 영철 형과 휘택이 형이 대학에 진학할 때, 큰형은 공장에 취직했다. <P 철관>이란 회사의 공장에 입사했다. 그 회사는 내 친구 정환이의 아버지이자 엄마의 친척인 아저씨가 간부로 있었던 큰 회사다. 그래서 형을 특별히 봐주어서 취직시켜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큰형은 이 얘기만 나오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친척 아저씨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봐준 게 아니었다는 거다. 그때 얼마나 힘들었으면 …….     

   엄마는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엄마들의 맏이들이 모두 대학에 가는 것을 보고 상실감이 컸다. 물론 그 집 아버지들은 모두 은행 간부에 육군 중령, 큰 회사의 간부였으니 우리 집과는 애초 사는 수준이 달랐고, 자식들 진학 문제도 그 수준에 맞게 신경을 썼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엄마는 넘어설 수 없는 격차를 인정하기에 앞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려 해도 마치 가위에 눌린 듯 어찌해볼 방법이 도무지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다.

   서울에 올라와 몇 년을 아등바등 살아내자 이제는 그런대로 살아지는 것이 신통하고 제법 여유도 생겨 안도의 숨을 내쉴 무렵에 덜컥, 아버지가 드러누웠다. 살 수는 있는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지경에 몰려서, 허우적대면 될수록 빠져드는 수렁 같은 절망 속으로 떨어졌다. 잘 걷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부축해 이 병원 저 병원을 두드리며, 살려만 달라고 애원하고 다녔을 엄마가 눈에 선하다. 세탁소고 살림이고 안중에도 없었고, 그나마 말귀 알아듣는 맏이에게 동생들 잘 챙기라 당부해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슨 정신으로였을지 허공을 딛고 다녔을 엄마가 보인다.

   큰형은 말 안 해주어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돌아가는 현실이 이해될 만한  중3이었다. 큰형은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의 부재가 몰고 올 상황을 상상했을 거다. 대학 다닐 여유도 여력도 없다는 것은 분명했고, 하루라도 빨리 취직해서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을 거다. 형은 그렇게 공고를 갔다.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온 엄마는 공장에 다니는 큰형이 안타까웠다. 동네의 또래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어 말쑥하게 차려입고 명랑하게 세탁소 앞을 지날 때, 공장에서 쇳덩어리와 씨름을 하느라 용을 쓰고 있을 큰형이 사무쳤다. 엄마는 다짐했다.

   “둘째부터는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대학을 보낼끼다.”     


    큰형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덩치도 크고 점잖았다. 다들 한 싸움 한다고 했다. 조무래기 급이 아니라, 왕초급이라고나 할까. 암튼 뭐 그런 아우라가 그 형들한테는 있었다. 큰형도 참 멋있었다. 특히 수경사 군 복무 때는 헬기 정비사를 했는데, 그 당시 사진을 보면 진짜 잘 생기고 멋있는 청년이었다. 형은 고등학교 때부터 ‘십팔기(十八技)’라는 중국무술을 했다. 큰길가 버스정류장 쯤에 백양사 세탁소가 있었고, 세탁소 바로 옆 침침한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십팔기 도장이 있었다. 형은 그 도장을 꽤 오래 다녔다. 나도 가끔 가봤는데 내가 다니던 태권도 도장하고는 분위기가 영 달랐다.

   일단 바닥이 시멘트 바닥 그대로였고, 도장 안이 어두웠다. 지하 특유의 서늘하고 음습한 기운이 한여름에도 소름을 돋게 했다. 게다가 한쪽 벽 전체에는 칼싸움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기다란 창이며 칼들이 죽 걸려있었다. 살기를 느꼈는지 좀 무섭기도 했다. 창과 칼에는 빨간 천이나 파란 천이 감겨 있어서 휘두를 때마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맞은편 벽에는 표창을 던지는 둥그런 통나무 같은 표적 판이 걸려있었다. 큰형이 도장 한복판에 서서 검은색 도복에 웃통을 벗은 채, 몸을 한껏 낮춰 무게중심을 바닥에 내리깔고 기다란 봉을 들고 휘두르는 장면을 보면, 완전 이소룡이었다. 동네 형기 형이 쌍절곤 들고 다니며 입으로만 ‘아뵤~’ 하는 이소룡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미아리의추억 #큰형 #공고 #십팔기

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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