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흐름으로 살펴보자
허리 아래로 내려 입는 배기팬츠, 커다란 박스티, 조던 신발, 그리고 치렁치렁한 금붙이들과 드레드 머리. 이런 것들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저도 모르게 어떤 래퍼를 떠올릴 테고 이런 옷을 입는 사람은 힙합을 즐기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힙합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다. 하나의 문화 현상이고 이것은 패션으로도 잘 드러난다. 그럼 이런 힙합 패션은 언제 생겨났고, 어떻게 변해왔고, 현재 모습은 어떨까?
먼저 힙합의 탄생을 먼저 살펴보면 힙합은 1970년대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 지역에서 디제이 쿨 허크(DJ Kool Herc)가 파티에 어울리고 춤출 만한 음악을 만든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당시 브롱크스 지역은 범죄가 많이 발생해 위험했고 또 가난한 흑인 및 라틴계들이 살던 도시였다. 이러한 지역적 상황은 자연스럽게 힙합이라는 문화에 묻어 나왔고 패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앞서 언급했듯이 커다란 옷을 입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들이 존재하는데 몇 가지 살펴보자 한다. 우선 이 당시 가난한 흑인들에게 새 옷을 사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이런 그들에게 XXXL와 같이 팔리지 않는 큰 사이즈 옷들의 재고떨이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큰 옷을 사 입던 것이다. 게다가 이 옷들은 춤을 추는 데 거치적거리지도 않았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었던 흑인들은 정상적인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마약, 총기 등을 불법적으로 팔았는데 경찰에게 들키지 않고 옷 안에 숨기기 위해서 큰 옷을 찾게 됐다는 유래도 있다.
벨트를 하지 않고 허리까지 바지를 내려 입게 된 유래도 재미있다. 그 당시 많은 흑인들은 범법행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때 교도소 규정상 벨트는 지급되지 않았다. 왜냐면 자살, 폭력의 도구로 사용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헐렁한 바지를 벨트 없이 입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려서 입게 된 것이다. 이러한 패션은 감옥에 갔다 온 진정한 갱스터라는 자부심의 표출이었고 갱스터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흑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유행으로 번졌다. 이렇게 가난과 아픔의 상징이었던 힙합 패션은 80년대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1979년 발표된 슈가힐 갱(Sugarhill gang)의 'Rapper's Delight’가 상업적으로 크게 히트를 치면서 8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힙합이 음악 시장 내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낸 시기였다. 이때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 런-디엠씨(Run-D.M.C), 엘엘 쿨 제이(LL Cool J) 등의 아티스트들이 큰 인기를 끌었고 또 힙합의 대중화에 앞섰다. 이중 런-디엠씨는 패션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는 비싸서 잘 입지 못하던 브랜드 옷인 ‘아디다스’를 입고 나오며 많은 화재를 일으켰다. 아디다스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 'My Adidas'라는 노래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I wear my Adidas when I rock the beat” 가사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또 다른 래퍼인 엘엘 쿨 제이는 이 당시 유행했던 ‘캉골’, ‘르꼬끄’, ‘푸부’와 같은 브랜드 옷들과 버킷 햇 등의 아이템들을 잘 매치시켜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다.
또 이때는 ‘국제흑인지휘향상협회’의 깃발색인 빨강, 검정, 녹색의 색상을 많이 사용했는데 여기서 빨강색은 피, 검정색은 흑인, 녹색은 아프리카의 풍요로운 자연을 의미한다. 이처럼 색깔을 이용해서 흑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재 청년층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조던 시리즈도 84년대에 발매되었다. 이제는 가난해서 옷을 사기 힘들었던 시대는 끝났다는 걸 알 수 있다. 힙합이 대중화되고 많은 수익을 창출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패션도 바뀌게 된 것이다.
아디다스를 즐겨 입었던 런 디엠씨.
변화의 흐름은 90년대에도 이어진다. 흔히 골든 에라(힙합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90년대에는 나이키, 아디다스와 같은 스포티 브랜드들이 더욱 더 유행을 탔다. 오버사이즈의 큰 상의와 통 큰 바지 등의 기본적인 틀은 과거와 비슷했지만 아티스트 스스로 좀 더 디자인에 신경을 썼고 옷뿐만이 아니라 듀렉, 뉴 에라와 같은 모자들과 또 신발까지 자기만의 개성을 나타내는 아이템으로 사용했다. 이때부터 래퍼들이 ‘ROCAWEAR’(제이지), ‘Wu-Wear’(우탱클랜)처럼 본인들의 이름을 걸고 브랜드를 런칭했다.
이 말고도 90년대에는 패션에 가장 큰 변화가 생기는데 바로 마피오소 스타일인 클래식 정장을 입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래퍼들이 정장을 잘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토리어스 비아지(Notorious B.I.G), 투팍(2Pac), 스눕 독(Snoop Dogg) 등 90년대 힙합의 아이콘들은 정장을 즐겨 입었다. 실제로 비기의 2집 앨범 <Life After Death>의 표지를 보면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마피아 단원이라도 된 듯, 한껏 멋낸 정장을 입은 스눕독과 투팍.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힙합은 메인스트림이다. 힙합의 입지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음악 프로그램은 ‘쇼미 더 머니’다. 이제는 힙합 음악을 음원 차트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은 완전히 힙합이 대세다.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음악 중 많은 음악이 힙합이고 래퍼들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추세이다. 그로 인해 시장은 과거보다 훨씬 더 커졌고 래퍼들은 더 많은 인기와 부를 얻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패션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래퍼들이 각종 하이엔드 업체들과 콜라보를 진행하는 것이 매우 흔해졌다. 그들은 온몸에 명품을 도배하고 다이아, 금 등의 고가의 액세서리로 치장한다. 가난했던 힙합이 이제는 부의 상징으로 변모한 것이다.
더욱이 이때는 개성이 중요해진 시대이기 때문에 다양한 브랜드가 유행했고 또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스키니진처럼 쫙 붙는 옷을 입기도 하고 남성 래퍼가 여성 옷을 입는 유니섹스 스타일도 등장했다. 물론 과거처럼 여전히 몇몇 래퍼들은 큰 사이즈의 옷을 입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치아에 금을 도배하기도 하고 형광 색색으로 염색도 한다. 자신들의 부를 패션이나 차 같은 데서 드러낼 뿐 아니라 가사로도 과시한다. 치아에 액세서리처럼 금니 그릴즈를 붙이고 다니는 래퍼 염따는 '9ucci’에서 “여자들은 철분이 부족, 내 금니(에서 섭취)“라고 노래하고 다닌다.
힙합의 시작은 가난했다. 하지만 이제 래퍼는 선망의 대상이고 또 자수성가의 아이콘이 되었다. 적지 않은 래퍼들이 과거부터 갈망해왔던 부와 명예를 얻었고 또 패션으로 그것들을 가감 없이 나타낸다. 이렇게 자랑하고 뽐내는 것은 힙합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하위문화다. 하지만 뭐든지 지나친 건 좋지 않다. 요즘 몇몇 래퍼들은 패션과 가사를 이용해 너무 과하게 그들의 부를 자랑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힙합 문화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물론 힙합을 좋아하는 리스너들도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너도나도 명품도배하듯 꾸미고 액세서리를 한 탓에 개성이 많이 사라진 듯하다. 과거 사회 빈곤층인 흑인들이 겪는 차별과 아픔, 상처 또 부조리들을 패션과 가사를 통해 보여주던 그때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