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한가운데 저녁, 추석(秋夕)이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감사의 풍요를 나누는 시간을 갖기 위해 고향에 왔다. 어느덧 고향을 떠나 지낸 지 15년이 흘렀다. 남편과 둘이 되어 타지로 떠난 우리는 어느새 네 가족이 되어 있다. 지금 내 인생에 있어 가을의 한가운데를 맞고 있는 기분이다. 어쩌면 살아온 시간 속에서 가장 마음이 풍성하고 평안한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0여 년 전, 생명이라고는 움틀 것 같지 않은 차디찬 겨울만 있을 것 같던 내 인생에 한 줄기 생명의 빛이 찾아왔다.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난생처음 받아 보았던 그 강렬하고도 따사로운 빛은 어두운 내면을 차츰 밝혀 주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철옹성 같은 내벽에 균열이 일어났다. 균열된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그 온기는 꽁꽁 언 차가운 마음을 녹여주었다. 녹아든 마음은 꽁꽁 묶어 두었던 감정들을 분출시키기 시작했다. 분노의 줄기, 슬픔의 줄기, 비관의 줄기… 영혼을 잠식해 뿌리마저 곪아 있던 마음이, 이제 그 기한이 다해 죽을 것 같던 마음의 터전이, 빛으로 인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빛과 함께 불어온 생명의 호흡은 심연 깊은 곳에 꿈씨를 심어 주었다. 나의 어떤 노력이나 성취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했던 내게 찾아온, 대가 없는 선물이었다.
심겨긴 작은 꿈씨는 내게 속삭였다.
‘너도 할 수 있는 존재, 살아도 되는 존재, 의미 있는 존재’라고. 그때부터 내 안에 새 생명의 줄기가 뻗어나갔고, 무가치한 인생이 아닌, 가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옭아매던 어둠을 비로소 벗어던졌다.
새로운 계절을 만났다. 생명이 움트는 봄을 만나고, 꿈을 꾸고 도전하고 노력하는 삶의 계절인 여름을 지나왔다. 그 안에는 가난, 질병, 꿈의 좌절이라는 실패와 낙심의 시간도 있었다. 내 힘으로 일군다 해도 삶의 결실이 마음먹은 대로 맺히지 않음을 깨닫는 시간, 겸손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아픔과 상처, 누리고 소유하는 모든 것조차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원하던 성취로 잔뜩 부풀었던 교만과 자만을 내려놓고, 심장이 터질 듯 질주하던 나를 멈추고 숨을 고르며, 내 페이스를 찾고 나를 나답게 살기 위한 생명을 불어넣는 시간을 지나왔다.
결실이 없어 보던 시간 속에서도, 뜻밖의 선물은 찾아왔다. 따스한 가정을 이루며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았고,화려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는 오늘을 살고 있다. 무명한 존재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과 감사로 채워지는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한때 나는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전부라 믿었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닿아야, 감사할 이유를 쥐고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닫는다.
그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긴 채 풍요를 말하던 나는,사실 기적처럼 주어진 평범한 하루하루를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지나며, 빛의 존재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감사가 더 큰 감사임을. 조건의 충족이 없는 현실 앞에서도 드릴 수 있는 감사가 진짜 감사임을.
그리고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생명 그 자체’ 임을.
생명 없는 물질에 집착하며 진정한 마음의 부요함을 잃지 않기를 다짐한다. 그 어떤 것도 어둠을 밝히는 빛, 생명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안다. 그 생명을 전하는 통로로 초대받은 인생, 그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연약하다. 세상 속에서 흔들리고, 또다시 속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휘청일지언정 꺾이지 않는 것은 내 뿌리를 붙들고 있는 생명의 근원 때문이다. 꺼질 듯 희미한 등불 같은 존재이지만, 결국 꺼지지 않는 이유는 내 안에서 타오르는, 영원히 지지 않는 그 빛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풍요를 맞이한 지금, 눈을 감고 잠잠히 생각한다. 남은 인생의 후반전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 무엇을 향해 나아갈지를. 이제는 내가 값없이 받은 감사와 사랑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마음 눈을 밝혀 어둡고 외로운 길을 걷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고 싶다. 그들의 마음에 작은 꿈의 불씨를 지피는, 풍요로운 가을을 맞게 하는 작은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풍요가 무엇인지를.
사그라들지 않는 그 영원한 빛이 내 안에 함께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