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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결혼, 한 번의 이혼

11. 나는 아들 뺏은 여자였다.

by Jihyun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2년이 지났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우리 집 거실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혈변이 나왔어…”


그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걱정과 두려움이 묻어 있는

낮고 조심스러운 톤.


나는 그 순간,

원망과 미움보단 걱정이 먼저 앞섰다.


서둘러

나는 병원을 알아봤다.


동네 건강검진센터를 예약하고 검사후

며칠간 내시경 결과를 기다렸다.

의사 소견은 간단했지만 무거웠다.


“대장암일 수 있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셔야 해요.”


남편은 또 말했다.

“나는 잘 몰라…

병원 좀 알아봐 줘.”


그 말 앞에

나는 잠시 멈췄다.


예전처럼

뭔가를 나서서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톤으로

내게 물으셨다.


“어디가 괜찮겠니?”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또 무너졌다.


한참을 고민하다.

집에서 가까운 보라매병원을 예약했다.

후기를 찾아보고,

교수진을 확인하고,

시설을 살폈다.

성심껏, 정말 최선을 다해

선택한 병원이었다.


결과는 대장암 2기.

수술은 잘 끝났고

회복도 빠르셨다.


하지만 기운을 차리자마자

시어머니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이 병원이 뭐가 좋다고…

싸구려 병원을 잡아? 일부러 그랬어?“


그 말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치의가 오는게 싸구려라서 그런거라며


정말 화풀이가 하고 싶었던 걸까.

혹은

익숙한 방식으로 나를 눌러버리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날,

마지막으로 결심했다.


두 번 다시 며느리 노릇은 하지 않겠다고.


남편에게도 말했고,

스스로에게도 단단히 새겼다.


나는 그동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드리고,

명절이면 직접 차려 대접하고,

필요한 양육비 외에

마트에서 장을 봐드렸고,

심지어 친정보다도

더 자주 찾아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의심받는 여자’였고,

‘믿음 받지 못하는 며느리’였으며,

‘아들의 애정을 뺏은 사람’ 일뿐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어떤 역할도 내려놓으려 한다.

착한 며느리도,

예쁜 며느리도,

불쌍한 며느리도 되지 않기로.


이제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지키는 것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잘하려 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참 이상하게도 한결 편해졌다.

어차피 이해받을 수 없는 사이.

애써 다가가고, 애써 맞추고, 애써 웃는 일에

지쳤고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분이 그러하니, 나도 그러하면 되겠다.’

딱, 그 선까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시어머니를 만나는 날이면

일부러 가장 늘어진 옷을 꺼내 입었다.

구멍 난 티셔츠나 바랜 니트를 걸치고

형식적인 미소 하나만 달고 나섰다.

말도 아꼈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보호하자,

놀랍게도

내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졌다.


무언가 잘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해방감.

더는 상처받을 일도 줄어들었다.


남편 역시 그간의 일들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나에게 “엄마에게 잘 좀 해드려”

“불쌍한 분이야”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 한편에서는 우울감이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매일 자책했다.

‘내가 부족해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일까.’

‘나는 도대체 왜… 살아야 하지?’


밤이면

하염없이 깨어 있었다.

아예 잠들지 못하는 밤이

연달아 이어졌다.


밥도 먹지 못했다.

속은 늘 메스껍고

무언가를 삼킨다는 것이

고문처럼 느껴졌다.


몸무게는 점점 줄어들었고

거울 속의 나는

낯선 사람 같았다.

너무 깡말라

사람들이 마주칠 때마다

“괜찮아? 어디 아파?”

라는 말을 당연히 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가 나를 바라보며

작은 입술로

“엄마…”

라고 처음 말했다.


그 순간

무너져가던 내 마음에

작은 등불이 켜졌다.


아,

살아야겠다.

이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살아야 한다.


그 생각에

나는 정신건강의학과에

예약을 넣었다.


의사 선생님 앞에서

나는

검사지를 마주하고,

증상들을 체크하고,

지난 몇 달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을 꺼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이었는지 모르게

얼굴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상담이 끝난 후 선생님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우리, 다음에도 꼭 만나요.

절대… 나쁜 생각은 하면 안 돼요.

증상이 꽤 심각한 단계입니다.

처방해 드린 약 꼭 잘 챙겨드세요.

그리고 꼭, 다시 오셔야 해요.”


그 한 마디가

처음으로

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위로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내 고통을 묻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다음에도 꼭 만나자’는 그 말은

살아도 된다고,

내가 아픈 게 나약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살아보자.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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