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잠시, 숨을 고르다.
장사는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가게를 시작하며 짊어졌던 빚도 어느덧 다 갚게 되었고,
하루하루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비를 줄이기로 했다.
대신, 그 돈을 모아
여행을 다니기로 약속했다.
저렴한 비행기 티켓을 일찍 예매하고,
아이를 재우고 나면 침대에 누워
호텔을 검색하고, 여행지를 찾고,
‘여기 어때?’, ‘이건 아이도 좋아하겠다’
이야기 나누며 웃었다.
그게 우리 부부의 공통된 취미가 되었고,
여행은 우리를 조금씩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명절에는,
어머니들과의 피곤하고 고된 행사 대신
서로를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명절마다 우리는 해외로 떠났다.
남이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햇빛이 가득한 호텔에서 쉬며,
아이와 사진을 찍고
소소한 풍경 속에 행복을 채워 넣었다.
그런 시간들이,
내겐 처음으로 느껴본
‘진짜 가족’이라는 감각이었다.
불안 없이,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과 웃음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도 오래가진 못했다.
2년 뒤,
코로나가 닥쳤다.
가게에는 손님이 점점 줄어들었고,
영업 제한이 생기고,
시간과 인원까지 모두 통제되면서
우리는 또다시 무너져야만 했다.
겨우 다시 살아보려 했던 삶이
다시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시기부터,
엄마는 나에게 더 강하게 집착했다.
“너밖에 없다”
“너는 딸이잖아”
그 말들이 날 조이기 시작했고
나는 또 죄책감과 피로 사이에서 무너졌다.
시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수도 줄었고,
불편한 눈치도 거두신 듯 했다.
아마, 남편이 어떤 이야기를 드렸겠지.
그 말이 무엇이든
적어도 더는 날 탓하지 않는 분위기만으로도
나는 감사해야 했다.
그렇게 또,
나는 버티는 시간을 시작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가게 문을 닫는 날이 많아졌다.
그것은 분명 힘든 시기였지만,
우리에겐 처음으로 숨을 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강제로 쉰다는 건 달리 보면,
그동안 미뤄둔 ‘우리’의 시간을 되찾는 기회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아이를 천천히 바라볼 수 있었고,
오랫동안 묻어뒀던 대화를 다시 꺼낼 수 있었다.
우리는 오히려 그 시절에
더 많이 웃고,
서로에게 더 많이 기댔다.
그 무렵,
제주도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동네,
바람결 따라 들리는 파도 소리,
새벽이면 안개 낀 오름길,
텅 빈 바닷가를 마주한 내 얼굴이
유난히 편안해 보였던 걸까?
남편은 어느 날,
“우리 제주에서 살아볼까?”라고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제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도시에선 숨 쉴 틈 없이 살아야 했지만,
제주에서는 조금 느리게,
조금 더 나답게 살아보고 싶었다.
아이의 학교를 정하고,
작은 집을 구하고,
이주 후 우린 1년 동안 안식년을 보내게 되었다.
오롯이 우리 셋만 생각하면서
많은 오름을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속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나는 조금씩 나를 되찾아갔다.
“행복하다”는 말이
억지로 하는 말이 아닌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왔다.
해맑게 뛰노는 아이는
더 밝아졌고,
그 웃음 하나에
우리는 충분히 위로받았다.
제주 정착 후에는
양가 부모님과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이 나를 향해 던졌던 말들,
무게감 있는 기대들,
그리고 이유 없는 상처들로부터
잠시 멀어져 있는 그 거리가
나에겐 가장 큰 평화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쌓여 있던 원망도,
그 미움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아이와 바닷가를 거닐며
소라게 줍고
작은 웃음에 배시시 웃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고요하고 따뜻한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