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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Apr 11. 2023

아카시아 향기

5월, 나는 파주 최전선 백야소초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전역을 앞두고 소연 씨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지구의 핵도 쪼개버릴 수 있을 만큼 혈기왕성한 시절 나는 매끼 한 숟가락씩만 먹으며


소초 안의 작은 운동장을 매일 백 바퀴씩 돌았다.


소초 안에서는 담벼락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소연 씨의 미소처럼 달콤한 향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뭔지도 모를 향기에 응원을 받아가며 후임 녀석이 얼굴이 반쪽이 됐다는 아첨을 할 때까지 살을 뺏다.




소연 씨는 이전 겨울 발목 부상으로 국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장교로 근무하던 간호장교였다.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깼는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얀 배경에 그녀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열을 하는 군인들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앞머리,


견장에 소위를 단 장교라고는 하지만 이제 갓 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하여 앳된 얼굴이


어울리지 않는 부모님의 옷을 빌려 입은 아이 같았다.


난 마취기운에 다시 잠들었고 좋은 꿈을 꾸며 웃으면서 일어났다.


그렇게 병원에서 재활을 하는 두 달 동안 다른 병동에서 일하는 그녀가 혹시나 지나가지 않을까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봤고 우연히 그녀가 바보 같은 웃음을 지닌 채 지나가면


나도 하루종일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밀크초콜릿을 한 번 주고는 아쉽게 자대로 복귀했다.


난 말년 병장이었고 전역 후 그녀에게 연락하였다.



전역 후 다음날부터 2주 동안 자전거 국토종주를 하였는데 그동안 좋은 풍경을 만나면


소연 씨에게 사진을 보내줬다. 외도에서는 수국을 말려 만든 책갈피도 선물로 샀다.



서울 시청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카페명처럼 뭔가 되길 바라며 투썸플레이스에서 그녀와 다시 만났다.


갓 전역해 지구 끝까지 달릴 수 있을 것처럼 자전거를 타던 나였지만,


정작 그녀 앞에서는 너무 좋아하여 긴장이 되었고 여자에게 숙맥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늘 날씨 참 좋네요'가 끝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떠나기 전 내게 잘 지내길 바란다고 했다.



전역 후 1년이 지나 길을 걷는데 익숙한 향기와 추억들이 별처럼 쏟아졌다.


그 향기는 아카시아 꽃나무였고 이 향기를 맡으면 말년 병장 때의 나로 돌아가 소초를 돌던 기분이 난다.


그 후로 내게 있어 아카시아의 꽃말은 '전역, 소연씨'가 되었다.


나는 이 설레는 이야기를 매년 5월 아카시아 향이 풍겨올 때 지인들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 옆의 여자친구에게는 말하지 못한다.


아카시아의 진짜 꽃말인 '숨겨둔 사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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