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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Nov 01. 2023

[전세지옥 B컷] 돈보다 소중한 것

 헝가리에 있었을 때, 친한 중학교 동창으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 친구는 노래를 잘하는 여자친구와 7년을 사귀고 22년 10월에 결혼을 계획했다.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였고, 오랫동안 자석처럼 여자친구와 붙어있느라 주위에 친구가 다섯뿐이라 했다. 그중 한 명인 내가 빠졌으니 전력의 20% 손해를 본 거라고 책임지라고 했다. 나는 다른 동창에게 부탁해 그 한 명의 자리를 메꿔주었다. 인맥은 메꿔줄 수 있었지만, 전세빚을 갚느라 축의금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외라서 인터넷 뱅킹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축의금은 나중에 전해준다고 했었다.

 친구는 내가 한국에 오면 펜션에 놀러 가자고 부탁했다. 캠핑을 좋아하고 요리와 바비큐가 특기인 내가 함께하면 더욱 풍성한 여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으로 귀국하자마자 일을 시작해서 카드빚을 갚어야 했기 때문에 거절을 했다.

 

 친구는 제수씨가 암에 걸렸다고 했다. 충격적인 소식이 메신저를 타고 텍스트로 내게 전달되었다. 글자였지만, 글자 속에 친구의 떨림이 메신저를 통해 함께 전송되었다.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에 있었다. 어부의 요새는 언덕 위에서 부다페스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새이다. 성곽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성곽에서 떨어질 뻔했다.

 돌이켜 보니 결혼 전부터 제수씨는 자주 피곤해했었다. 결혼하고 한 달이 되었을 때, 혹이 잡혀 검사를 해보니 암 4기였고 이미 손쓸 수 없는 시기가 되었다고 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친구는 일을 그만두고 장인어른이 보내주는 돈으로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한 번은 친구가 제수씨와 다퉜는데 암선고를 받기 전까지 잘 울지 않던 제수씨가 엉엉 울며 이제 시간이 없다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국에 귀국하고 이틀 후 중학교 동창 다섯 그리고 제수씨와 양평의 어느 펜션으로 놀러 갔다. 제수씨는 여럿이서 펜션에 놀러 가 함께 카드게임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사소한 일이 그녀에게는 버킷리스트였을지도 모른다.

 바비큐를 하는데 제수씨가 먹는 고기는 속은 완벽히 익어야 하고 겉은 타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신중을 기하며 고기를 구웠다. 나를 포함한 우리 다섯은 제수씨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순간 우리는 지구가 아닌 제수씨를 지키기 위한 독수리 오형제가 되었다. 그녀는 잘 웃었고 웃는 그녀를 보며 우리도 웃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봄에는 LG Twins 야구 관람, 여름에는 홍천 계곡 여행, 가을에는 단풍 구경. 하지만 겨울에 대해서도 내년에 대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바로 앞에 다가올 계절에 대한 계획을 나열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제수씨는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우리들과 함께 놀러 가야 한다.


 순간 2018년의 겨울이 떠올랐다. 교토의 붓쿄(불교)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수료하고 수료식에서 소감을 말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교토에 왔을 때는 카페에 가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싶은 계절인 여름이었습니다. 곧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었고 지금은 카페에 가면 따듯한 커피를 주문하고 싶네요. 반년 간의 교환학생을 끝내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교토에는 다시 녹음이 지고 여름은 돌아오겠지만 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불교의 윤회사상 때문인지 장내에 있던 스님들에게도 큰 박수를 받았다.


 제수씨의 꽃이 얼마나 더 피어있을지 차마 내 입으로 물어볼 수 없었고 친구도 자신의 입으로 얘기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에게 모든 계절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눈, 새싹, 뜨거운 태양, 단풍, 무지개, 초승달과 보름달 심지어 장맛비마저 그녀에겐 소중할 것이다.

 그녀의 꿈은 이탈리아에서 한 달 살기라고 했다. 신나서 로마의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붉은 지붕의 풍경과 성당 첨탑들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그 순간 그녀의 눈 깊은 곳에서 슬픔이 느껴졌고, 나는 이야기를 멈췄다. 내겐 일상이었던 것이 그녀에겐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녀가 언젠가 이탈리아에서 건강하게 이탈리안 피자와 파스타와 함께 이탈리안 스프리츠까지 향유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비참하고 슬픈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가슴에 말 못 할 상처 하나쯤은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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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끝, 여름의 시작 사이에 하루에도 20도에 달하는 심한 일교차가 있던 6월 초였다. 큰 일교차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과 어떻게 해서든 위기를 헤쳐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다. 그즈음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남은 인생 10년’을 보았다.

 회사에 잘리고 부모와 연이 끊겨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남자 주인공 카즈토(사카구치 켄타로)는 자살을 시도한다. 반면, 불치병에 걸린 마츠리(코마츠 나나)는 살고 싶어 한다. 그런 둘이 인연이 되어 삶의 의지를 얻는다. 카즈토는 요리를 시작하고 마츠리는 칼럼을 기고한다. 그 당시 초밥집에서 일하고 책을 썼다.  죽고 싶은 동시에 살고 싶은 나의 두 자아가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으로 녹아있는 것 같았다.

 이별을 하면 세상 모든 음악이 내 이야기인 것처럼 들린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시작부터 그 둘은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카즈토의 눈에서는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 보였고 마츠리의 눈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보였다. 이야기가 하나도 전개되지 않았는데 나는 그들의 눈만 봐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눈에 댐을 설치하고 싶었다. 이내 영화가 전개되고 본격적인 슬픈 장면이 나오자 영화관 안의 다른 관객들도 울기 시작했다. 그때 최대한 막아 놓았던 눈물들을 마음껏 방류하였다.

 영화를 다 보고 새벽의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집까지 걸어오며 삶과 생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갑자기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잠재의식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한 문장이었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책이었다. 현재는 절판이 되어있었지만, 중고책을 살 수 있었다.  


 삶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 소중한 것을 포기하려 했던 나 스스로에게 사과한다.

 100억을 누가 준다고 하면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허나, 100억을 받는 대신 삶이 내일 끝난다고 하면 100억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삶은 100억보다 가치 있다. 나는 겨우 5,800만 원을 잃었는데 2년을 괴로워했다. 괴로움은 내가 자꾸 만드는 것이다. 다 잊고 새로 시작하면 된다. 100억보다 가치 있는 내 하나뿐인 삶을 어떻게든 잘 꾸며나가 보도록 하자.


이 글을 보는 힘들고, 죽고 싶은 사람들 모두 그냥 버티세요. 곧 봄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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