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을 놓으면 안됩니다. 버티셔야 해요.
대리기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예약콜을 잡았다. 예약콜이란 고객이 출발시간을 정하면 그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것인데, 중간에 취소되는 경우도 많아 대리기사들이 많이 활용하지 않는 것이다. 종합운동장 근처에서 손님을 내려주고 맥도날드 커피숖에서 휴대폰 충전을 하며 기다리는데 1시간 뒤 출발하는 예약콜이 떴다. 목적지는 대치동 레미안펠리스 그냥 나도 모르게 수락을 눌렀다.(왜 맥도날드 커피냐고? 대리기사를 하면 한 콜당 보통 1~2만원 사이, 절대 5700원 스타벅스 커피 못 마신다. 맥도날도 1500커피라면 모를까)
잠실운동장역에서 급행 9호선을 타고 보훈병원 종점에 내렸다. 고객에게 전화를 하니 일행들이 나온다. 나에게 차키를 건네면서 죄송한데 담배한대 피고 출발할건데 따뜻하게 차에서 좀 기다려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라고 정중히 묻는다. 나이는 50대 후반, 키는 180 정도에 덩치도 있으시고 인상은 약간 매서웠지만 매너가 좋으신 분이었다.
이분과는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라,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건넨 전화에서 살아오면서 한번도 부모 속을 썩인 일이 없는 모범생이 느꼈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내가 먼제 말을 꺼냤다. 목적지가 우리집 근처라 바로 퇴근해야겠습니다. 중년의 남성은 좀 놀라는 눈치였다. 그럴것이 주말 대리기사 하는 40대 중반의 남자의 집이 우리나라 최고가 부유촌 중에 하나인 강남 대치동이라니...
이런 경우 고객이 질문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한다. "투잡으로 여라 사람들 만나기 위해 대리기사 알바 하고 있으며 자녀 교육을 위해 대치동 월세살이 하고 있어요." 라는 말이 무섭기 그는 뒷자석에서 고개를 숙이며 나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면서 불과 몇분전까지 휴대폰만 쳐다보다 호기심이 생겼는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나도 불과 7년 전에 마포에서 대치동으로 왔어요. 자녀 교육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여기가 좋아서 계속 살고 있어요. 버티세요. 여기서 버티면 자녀 교육 성공할 수 있어요. 우리 첫째 딸이 XX대 의대를 갔고 둘째 아들이 서울대 공대를 갔어요. 버티세요"
자녀 교육 얘기가 나오자 마자 거침없이 쏟아지는 자녀 자랑, 근데 난 자랑으로 들리지 않았다. 자녀 교육을 위해 대치동까지 이사온 자기와 같은 사람들에에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말한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버티세요" 라는 말이다. 때로는 사춘기 아들의 방황에 잠 못잘 일이 있고, 고등학교 내내 아들의 눈치를 보며 지내온 세월에 대한 보상이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온다는 것이다.
대치동에서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데 그 버티는 과정이 쉽지 않을 뿐이지 버티면 원하는 목적을 이룬다는 그 말..나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첫째 딸이 주변 친구들과의 관계로 스트레스 받을때 그 블인힘. 사춘기 아들이 공부하기 싫다며 가출했을때 온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며 아들을 혼냈던 기억. 중년 고객님의 머리속에 남아 있는 과거가 지금은 추억이 되어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