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남은 삶은 어떡하라고?

나는 이곳에 있지만 없다.

by Nearer than heaven

출국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떠나기 전에 건강검진을 받아보라고 했다. 나는 아이들과 일 년간 해외로 나가기로 한 터였다.


말이 일 년이지, 여차하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반항심, 그리고 정말로, 드디어, 한국을 떠날 수 있구나 하는 흥분과 설렘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명분은 아이들의 교육과 드넓은 세상의 경험을 위해 떠나는 여정이었지만 그 시작은 '나'였다.


나는 늘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에 못다 한 일, 못다 이룬 커리어, 떠나보낸 인연, 온갖 너저분한 후회와 지질함, 자책들을 틈만 나면 반추하는 습관이 내 숨결처럼 붙어있었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역할과 내 안의 간극이 너무 커서, 그 사이에서 늘 허덕이는 나날들이었다.

나와 가까운 지인들은 내가 맡고 있는 여러 역할들 - 가정을 이룬 아내,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 어른으로서의 내 모습을 마치 연극배우가 공연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도 할 정도였다.


이제 내 나이가 정확히 몇 살 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와중에 맞이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은 내 코와 입을 막아놓고 있었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대 사회의 조건으로만 따진다면 나는 꽤나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나는 있는 그대로, 부족함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나를 현재에 머물지 못하게 막고 있었을까.


어린 시절 내가 모토로 삼던 문장은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살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대로 살게 된다.'였다. 나는 내 인생의 궤도가 내 머릿속 계산에서 벗어날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다. 내 주변을 살피며 '저 사람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혹은 '저런 집에서는 어떻게 살지?', '나 저렇게 무능해지면 어쩌지?' 하며 끊임없이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부수었다가 더 단단히 세우기 일쑤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한국이 죽도록 싫다면서, 한국사회가 원하는 규격에 맞는 삶을 절대적으로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돌이켜보면 참 건방진 생각이었다.


애석하게도, 젊은 시절의 나는 (지금도 충분히 젊지만)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이끌어 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원하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내 직업이 전문직이라 말할 수 있었고, 누군가를 만날 때의 기준도 꽤나 엄격했다. 그렇게 결혼도 내 기준에 맞춰 숙원사업처럼 마무리 지었다. 사랑보다는 안정감이었고, 게스트하우스의 낭만보다는 호텔의 쾌적함과 여유를 선택했다고나 할까. 남편에겐 미안한 얘기지만.(하지만 남편도 같은 입장이었을 거라 확신한다!)


아무튼 그렇게 무지개와 핑크빛이 가득한 시즌 1이 끝이 났다.


시즌 2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도 없이 우울했고, 책임져야 할 두 명의 작은 인간을생각하면 두렵고 무서웠다. 내 모든 것을 갈아내며 키워낸 부작용 같았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 경력이 끊어져 있었고, 그렇다고 아무 일을 하기에는 내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아이가 너무 어려서, 아니면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길 수 없어서, 내가 벌어올 작고 하찮은 소득에 아이의 예쁨을 포기할 수 없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일을 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니면 일이 하고 싶지 않아서였거나. 잘 모르겠다.


한동안은 그런 내 선택에 만족한 듯 느껴졌다. 내가 이제껏 엄마가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오던 시절에 저지른 온갖 죄와 악행, 무지를 용서받는 시간 같았다. 온전한 사랑, 무한의 사랑만 느낄 수 있어 황홀했다.


하지만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는 것일까.

내가 세운 내 삶의 단단한 룰과 울타리는 언제나 차례대로 무너지기 일쑤였다. 나는 열심히 좌절했고, 자책했고,혼란스러웠다. 하루하루가 힘들다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져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나의 절망을 하소연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나의 높았던 자아효능감이 떨어져서였을까, 삶의 만족도가 처참히 낮아져서였을까. 내 삶의 시계태엽을 돌릴 수 있다면, '만약에 그때..'라는 과거로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과거에 사는 현재형 인간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