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떠나면 안돼요.

새 출발을 기다리며.

by Nearer than heaven

나 자신을 현재로 데려오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꿈을 꿔야만 했고, 새로운 내일을 기대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 날은 흘러가버린 하루가 서글펐고, 또다시 다가 올 내일이 두려웠다.


나를 바라보고 웃는 이들의 눈빛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날이면 죄책감에 무릎을 꿇고 울어버리고 싶은 나날 들이었다. 아마도 우울증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나에게도 깊이 머물렀던 것 같다.


나는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여기를 떠나면, 서울을 벗어나면,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우울을 업고 지내며 받아온 상처들도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고 새 살이 솟아나지 않을까 기대했다.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면.


그동안 내가 배워오고 직업으로 삼아온 일에 대한 미련도 남지 않았고, 아쉬움도, 그림자도 남기지 않은 채 훌쩍 떠나서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해볼 계획이었고, 지금껏 살면서 내가 머릿속에서 치밀하게 짜왔던 내 인생 궤도가 예측불가한 상태로 흘러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되었다.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까? 정말로 내 인생에 새로운 무언가가 생길지도 몰라, 하는 기대감과 함께.


이주를 준비하며 나는 거짓말처럼 활기를 얻었다.

준비하는 게 힘들다 말하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걸 즐겼고, 한국에서의 막막한 교육과 미래를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라는 것을 믿고 또 믿었다.

이 길이 맞는지 수도 없이 의심을 했지만, 이번만큼은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새롭게 펼쳐질 내 인생을 벌써부터 사랑할 지경이었다.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 어딘가 불안하지만 애써 숨겨가며 마지막 건강검진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나 건강검진 하다가 뭐 나올까 봐 후들후들함.' 따위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어딘가 무거운 마음을 가벼운 농담으로 쳐내는 날이었다.



나는 대기실에 앉아있었고, 간호사는 나를 보더니 혼자 온 건지 물었다.


의사는 당장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로 비행기를 타면 안돼요, 지금은 안돼요.


진료실의 모든 사물이 일제히 멈춰서 나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암이라고 했다.


출국을, 새 출발을,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믿었던 날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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