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가을, 딸은 결혼을 했다.
사람들은 기쁜 일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딸이 결혼 하던 날 결혼식 내내 마음에 품은 화를 감추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 정도였다.
그 화는 딸이 ‘나 결혼할 사람 있어.’ 라고 말하는 순간 시작되었다. 나에게 그 말은 이제 난 가족을 떠날 거야. 라는 말과 같다. 딸은 성인이므로 부모 허락 없이도 결혼 할 수 있다. 하지만 딸은 자기의 결혼이 가족에 대한 배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딸은 절대로 결혼해서는 안 된다. 딸이 결혼하는 순간 내 가족은 붕괴되고 만다.
나는 과부다. 남편은 딸이 초등학교 삼 학년,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삼월에 죽었다.
‘미망인이라고 불러줄까? 과부라고 불러줄까? 남편을 따라 죽지 못했으니 미망인? 그래도 과부가 낫지?’
그렇게 난 과부가 되었다.
‘남편 없는 게 죄야? 내가 죽인 거야? 왜 다들 날 그렇게 봐?’
나는 걸핏하면 화를 냈다. 그런 나에게 과부 히스테리 증후군이라는 판정이 내려졌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옛말에 아무리 병신 남편이라도 아랫목 차지하고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낫다 라더니. 과부가 뭐 잘난 거라고 닮냐 닮기를.’
본인도 일찍이 과부가 된 친정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과부가 되자 본인을 탓했다.
‘남 소용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붙이밖에 없어. 딴 생각 말고 새끼들 붙잡고 살아 보거라. 잘 키워 놓으면 웃을 날 있을 거다. 새끼들도 어미 고생 알아 줄 거고.’
시아버지는 당부와 함께 남편의 명의였던 아파트를 내 명의로 바꿔주었다.
친정어머니와 살림도 합쳤다. 그때부터 나에게 가족은 친정어머니와 딸, 그리고 아들이 다였다.
남편이 없는, 아빠가 없는, 사위가 없는 가족이라고 해서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았다. 함께 웃어줄 일이 있으면 함께 웃어주고 함께 울어줄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고 이야기 들어 줄 일이 있으면 들어 주고 위로해 줄 일이 있으면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줄 일이 있으면 격려해 주고 도와 줄 일이 있으면 도와주는, 일반적인 가족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생활은 꽤 오래 이어졌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하지만 딸이 중학교 삼 학년이었던 해, 친정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더니 끝내 ‘불쌍한 니 에미, 니가 잘 돌봐줘라.’ 라는 당부를 끝으로 눈을 감으셨다.
나는 친정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딸과 아들에게는 물론 나 자신에게도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두려움이 앞섰다.
‘이제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도 이렇게 까지는 아니었는데.
누가 뭐래도 난 자신이 있었다.
‘당신 자식 멋지게 키울게. 걱정 말고 푹 쉬어.’라는 말로 남편에게 작별을 고할 만큼 당당했다.
그런 나의 자신감은 친정어머니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결혼 전에도 후에도 친정어머니와 함께 했다. 둘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 덕분에 과부의 삶은 생소하지도, 두렵거나 외롭지도 않았다.
그런 친정어머니가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막막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 울지 마. 할머니가 걱정하시면 어쩌려고.’
나는 딸을 와락 끌어 안았다. 명치에 고여 있던 눈물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며 꺼억꺼억 소리를 냈다.
그 후로 딸은 외할머니의 당부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그런 딸을 친정어머니인 듯 의지하기 시작했다.
사실 딸은 어려서부터 내 주변 사람들에게 ‘딸이 엄마 같다.’ 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런 딸 덕분에 셋만 남은 나의 가족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네가 엄마니까, 네가 평생 동생 보살펴 줘야 한다. 너도 마찬가지다. 내가 없으면 누나가 엄마니까 평생 누나를 돌봐줘야 해.’
불쑥 불쑥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나는 잊지 않고 딸과 아들 앞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곤 했다. 그 말끝에는 ‘남한테 잘해줘 봐야 소용없어. 결국 남은 남일 뿐이더라.’라는 말도 곁들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도 결국 남이야. 너희에게는 너희 둘 밖에 없어.’ 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딸은 일찍부터 진로를 정하고 공부한 덕에 본인이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예고? 둘이 벌어도 뒷바라지가 힘들다는데, 너 혼자서? 고등학교에 대학에 유학까지, 그 뒤를 다 댈 수 있다고? 잘 타일러서 그건 그냥 취미로 하고 공부하라 해. 열심히 공부해서 직장 생활하다가 결혼하라 해. 너도 생각 잘 하고. 뱁새가 황새 쫓다가는 가랑이 찢어지는 법이야.’
딸을 예고에 보낸다고 하자 친구는 내 앞에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딸은 고등학교 졸업 후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유학 대신 대학원을 택했다. 당연히 유학을 원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딸에게 이유를 묻자, 차마 엄마와 동생을 두고는 갈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원하던 이유였다.
그랬던 딸이 결혼을 한다고 했다. 가족을 위해 유학도 포기했던 딸이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딸의 말을 부인했다. 딸이 결혼하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굳건히 지켜 온 내 가족은 일순간 무너지고 만다.
안 된다. 내 가족은 내가 죽을 때까지 이어져야 한다. 내가 어떻게 지켜온 가족인데.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결혼한 딸은 출가외인이다. 결혼한 딸은 더 이상 내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셋뿐인 내 가족이 딸의 결혼으로 인해 깨진다니, 용납할 수 없다.
나는 기를 쓰고 말렸다.
아직은 아니다 라며 애원도 해봤다.
청상과부인 내가, 행여라도 나로 인해 가족이 상처를 입을까봐,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가족을 지키지 않았냐며 구차한 변명도 늘어놓았다. 차라리 유학을 가라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며 회유도 해보았다.
‘올 필요 없다.’
신혼여행 후 인사 오겠다는 딸과 사위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 후로도 딸이나 사위와의 만남은 일체 없었다.
그렇게 지낸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 날, 이른 아침부터 휴대폰 벨이 울렸다. 딸이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벨이 울렸다. 또 딸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불길한 생각이 들어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어.’ 딸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제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자그마하니 단아한 모습의 안사돈은 결혼식이 끝난 후 나를 찾아 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갈 줄 알고 그런 당부를 했나?
내가 안사돈을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고인이 된 안사돈은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잃은 사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떨궜다.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를 잃은 그 슬픔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에 더욱 그랬다. 나는 사위의 손을 잡았다. 차갑기 그지 없는 손은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한 손으로 딸의 손을 잡았다. 딸의 손 역시 차가웠고 힘이 없었다.
'미안해 김서방. 너도. 어머니 잘 보내드리고 둘이 집으로 와.’
딸과 사위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 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뜨거웠다.
딸과 사위로부터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축하해요. 사위도 자식이라는데, 딸이 결혼한 덕에 가족도 늘고, 딸 잘 키웠어요. 요즘 애들 자기 생각만 하고 결혼은 안 하려고 하는데 효녀에요. 앞으론 좋은 일만 있을 거에요. 고생했어요.’
그제서야 나는 가족이 된 사위를 기다리며 그 말을 건넸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