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16화. 은해진 — 내가 기댈 수 있었던 안정 전류

by 담윤



남편 은해진을 떠올리면

특별한 사건이 먼저 나오지 않는다.


크게 웃었던 기억도,

강렬한 대화도,

결정적인 장면도 없다.


그런데도 분명한 건 하나다.

그 사람 곁에 있으면, 나는 덜 흔들렸다.



은해진과의 관계에는

항상 여백이 있었다.


말이 없을 때는

말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기분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친밀감이라기보다는

안전에 가까웠다.



나는 한동안

이런 관계를 과소평가했다.


자극이 적고

반응이 느리고

감정의 파도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그땐 몰랐다.

이게 바로 전력이 안정적으로 흐르는 상태라는 걸.


전압이 일정하면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시스템은 오래 버틴다.



은해진과 함께 있으면

나는 굳이 나를 조정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낮출 필요도,

밝힐 필요도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 상태 그대로 있어도 괜찮았다.


그 사람은

나를 끌어올리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두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나에게 낯선 경험이었다.


나는 늘

누군가와 있을 때

‘어떤 나’로 있어야 했다.


유쾌한 나,

이해심 많은 나,

괜찮은 나.


하지만 은해진 앞에서는

그 역할들이 하나씩 내려갔다.


그리고 그때서야 알았다.


아,

내가 피곤했던 건

사람 때문이 아니라

역할 때문이었구나.



은해진과의 관계는

소모를 막아줬다.


나는 그걸

아주 늦게 깨달았다.


회복되기 전의 나는

늘 ‘더 나아지게 만드는 관계’를 찾았다.


회복 이후의 나는

‘덜 망가지게 하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 관계가 특별한 이유는

지속 시간에 있었다.


한 번 만나고

이틀을 앓지 않아도 되었고,

다음 약속을 생각하며

에너지를 미리 당겨 쓰지 않아도 되었다.


관계가 끝난 뒤에도

나는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건 아주 큰 차이다.



은해진은

나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 대신

오해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해받으려면

설명이 필요하지만,

오해받지 않으려면

그저 안전하면 된다.



나는 이제 안다.


은해진 같은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의 특정 구간에서

이런 안정 전류가 없다면

사람은 반드시 과열된다.


나는 그 관계 덕분에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그건

사랑도, 우정도 아닌

유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유지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