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17화. 하율진 — 불안정한 과거 회로

by 담윤



하율진을 떠올리면

항상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 먼저 온다.


그 사람과 있으면

나는 현재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나로 돌아가 있었다.


이미 지나온 감정,

이미 겪어낸 불안,

이미 끝냈다고 믿었던 질문들.


하율진은

새로운 전류라기보다

오래된 회로를 다시 켜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게 친숙함처럼 느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은 느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는 상태.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건 안정이 아니라 예측 가능성이었다.


안정은 나를 편안하게 만들지만,

예측 가능성은 나를 과거에 묶어둔다.



하율진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미묘한 긴장이 깔려 있었다.


갑자기 연락이 뜸해질까 봐,

말 한마디가 오해로 번질까 봐,

침묵이 길어질까 봐.


나는 먼저 반응했고,

먼저 설명했고,

먼저 맞췄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불안 회로의 자동 실행이었다.



이상한 건

그 사람과의 관계가

특별히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익숙했다.

그래서 위험했다.


익숙함은

경고음을 무디게 만든다.


나는 그 불안이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내 성격 때문이라고 믿었다.


“원래 내가 좀 예민하지.”

“원래 이런 관계는 이 정도는 감당해야지.”


그렇게

과거의 나를 다시 호출했다.



하율진은

나를 공격하지도,

의도적으로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반응 패턴은

늘 불확실했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분명했던 말이 흐려지고,

확인하려 하면 대답이 늦어졌다.


이 불확실성은

내 회로에 익숙한 신호였다.


그래서 나는 더 집요해졌고

더 피곤해졌다.



결정적인 차이는

관계가 끝난 뒤에 드러났다.


은해진과의 만남 뒤에는

내가 남아 있었지만,


하율진과의 만남 뒤에는

과거의 내가 남아 있었다.


의심하던 나,

설명하던 나,

버티던 나.


나는 그 상태로

다음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그제야 알았다.


이 관계는

나를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나를 되돌리는 관계라는 걸.


회복 이전의 나로.


그래서 힘들었다.



나는 이제

불안정한 관계를

‘강렬했다’고 미화하지 않는다.


그건 강렬함이 아니라

미해결 회로의 재생이었다.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 과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율진을 통해

나는 하나를 배웠다.


사람은

새로운 고통보다

익숙한 고통을 선택한다.


그리고 회복은

그 선택을 멈추는 데서 시작된다.



하율진은

내 인생에서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시 연결될 필요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내 회로는

비로소 현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