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32화. 무너져도 다시 켜지는 뇌

by 담윤



회복의 끝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았다.


달라진 건

무너지지 않는 내가 아니라

다시 켤 수 있는 나였다.



예전의 나는

무너짐을 한 번의 판정처럼 받아들였다.


꺼지면 끝,

끊기면 실패.


그래서 작은 이상 신호에도

공포가 먼저 왔다.


또 시작인가.

이제 다시 내려가는 건가.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공포를 바로 사실로 번역하지 않는다.


무너짐은

종료가 아니라 상태 변화일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뇌는 생각보다

회복을 기억한다.


한 번 연결됐던 전선은

완전히 잊히지 않는다.


다시 과부하가 오면

속도는 느려질 수 있고,

선명함은 흐려질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건 희망이 아니라

경험이다.



무너질 때의 감각도

이제는 다르다.


예전엔

아무 예고 없이 꺼졌다면,

지금은

경고등이 먼저 켜진다.


집중이 좁아지고,

말이 부담스러워지고,

사소한 자극이 크게 느껴진다.


이건 실패 신호가 아니라

전원 관리 요청이다.



그래서 나는

그 신호에 대응한다.


억지로 켜두지 않고,

더 밀어붙이지 않고,

당장 고치려 하지 않는다.


사용량을 줄이고,

접속을 끊고,

기본값으로 돌아간다.


그 선택 하나로

붕괴는 깊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변화는

이 지점에서 일어났다.


무너지는 순간에도

나를 버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


예전의 나는

상태가 나빠지면

나를 평가했다.


지금의 나는

상태를 점검한다.


평가와 점검의 차이는

회복 가능성을 완전히 바꾼다.



뇌가 다시 켜진다는 건

항상 밝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어둡게 켜질 수도 있고,

조용히 켜질 수도 있고,

최소 밝기로 켜질 수도 있다.


하지만 켜진다.


그리고 켜졌다는 사실 하나면

다음 선택이 가능해진다.



나는 이제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너짐이

내 전부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건

강인함이 아니라

재가동성이다.


다시 켤 수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을 기억하는 뇌.



회복은

완성형이 아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 오면

확신이 하나 생긴다.


나는 한 번 꺼졌던 뇌를

다시 켜본 사람이다.


그 경험은

앞으로도

나를 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