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34화. 전력을 소비해도 다시 충전할 수 있다는 믿음

by 담윤



한때의 나는

전력을 쓰는 걸 두려워했다.


사람을 만나고,

말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모든 순간이

소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계산했다.

아껴야 한다고, 남겨둬야 한다고.


하지만 회복의 끝자락에서

믿음 하나가 조용히 자리 잡았다.


전력을 써도, 다시 충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낙관에서 오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로

버틴 결과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전력을 써서 바닥까지 가봤고,

완전히 방전된 상태도 겪어봤다.


그래서 알게 됐다.


전력이 0이 되어도

시스템은 남아 있다는 것을.



예전의 나는

전력 = 생존이라고 믿었다.


조금이라도 쓰면

곧 고장 날 것 같았고,

한 번 소모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력을 쓰는 순간마다

불안이 따라왔다.


이러다 또 무너지면 어떡하지.


이 불안이

실제 소모보다

더 많은 전력을 잡아먹었다.



회복 이후의 나는

전력을 다르게 본다.


전력은

아껴야 할 자원이 아니라

순환하는 자원이다.


쓰면 줄어들지만,

조건이 맞으면 다시 찬다.


이 단순한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배웠다.



충전의 조건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 과도한 설명을 하지 않을 것

• 상태가 나쁠 때 무리하지 않을 것

• 회복을 미루지 않을 것


이 세 가지만 지켜도

전력은 서서히 돌아왔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확실하기만 하면 됐다.



이 믿음이 생기자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


전력을 쓰지 않으려

뒤로 숨지 않게 되었고,

쓸 때를 알고

멈출 때를 선택하게 되었다.


소모와 충전을

같은 선 위에 놓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전력을 쓰는 나를

무책임하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전력을 전혀 쓰지 않는 상태가

더 위험하다는 걸 안다.


전력이 흐르지 않으면

회로는 굳는다.


흐르고, 줄고, 다시 차는

이 과정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 믿음은

나를 무모하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덜 겁내게 만들었다.


조금 써도 괜찮고,

잠시 떨어져도 괜찮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


이 확신이

나를 다시 삶 쪽으로

한 걸음 옮기게 했다.



나는 더 이상

완충 상태에서만

살려고 하지 않는다.


사용 중인 상태에서도

충전이 가능하다는 걸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 하나로

삶은 훨씬 넓어졌다.



전력을 소비해도

다시 충전할 수 있다는 믿음은

나를 강하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지속성이야말로

이 긴 회복의 여정에서

내가 얻은 가장 현실적인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