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35화. 삶의 회로는 다시 설계 가능하다

by 담윤



한동안 나는

삶이 이미 결정된 것처럼 느꼈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

이렇게 지치는 사람,

이렇게 무너지는 사람.


마치 공장에서 찍혀 나온 회로처럼

고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회복을 지나오며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회로는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설계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설계는

다시 할 수 있다.



삶의 회로를 다시 설계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나를 기준으로

무리가 덜 가는 구조로 바꾸는 일이다.


예전의 나는

항상 최대 효율을 목표로 설계되어 있었다.


빨리 반응하고,

많이 감당하고,

끊임없이 연결되는 구조.


그 설계는

언젠가 반드시 과부하를 일으켰다.



재설계의 첫 단계는

삭제였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 즉각적인 답변

• 모든 관계의 균등한 관리

• 항상 괜찮아 보이려는 태도


이것들을 지우자

회로는 바로 가벼워졌다.



두 번째는

우회 경로를 만드는 일이었다.


직선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피로가 올 때 빠져나올 수 있는 길.

• 대화 중 잠시 멈추는 선택

• 일정에서 하루 비워두기

• 감정이 클 때 처리 미루기


이 우회로 하나가

삶 전체를 살렸다.



세 번째는

안전 장치를 넣는 것이다.


전압이 떨어질 때

자동으로 작동하는 규칙.

• 밤 9시 이후 중요한 결정 금지

• 몸 신호가 오면 일정 취소 허용

• 회복이 필요할 땐 설명 면제


이건 나약함이 아니라

정교한 설계다.



이렇게 회로를 다시 짜고 나서

놀라운 일이 생겼다.


삶이 더 좁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속 가능해졌다.


전에는

짧게 불타고 꺼졌다면,

이제는

낮은 밝기로 오래 켜져 있다.



나는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


더 잘하려는 욕심 대신

덜 망가지는 구조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나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삶의 회로를 다시 설계한다는 건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때의 설계가

그 시점에서는

최선이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조건이 생겼다는 것도

함께 인정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삶을 시험처럼 대하지 않는다.


통과하거나 탈락하는 구조가 아니라

조정하고 유지하는 시스템으로 본다.


고장 나면 고치고,

부하가 크면 줄이고,

필요하면 다시 배선한다.


이게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삶의 회로는

한 번 정해지면 끝나는 게 아니다.


환경이 바뀌면

상태가 바뀌면

설계도 달라져야 한다.


그걸 허락하는 순간

삶은 훨씬 덜 잔인해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여정을 한 문장으로 묶을 차례다.


회복의 결과가 아니라

증거로서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