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를 어기면 더 편해진다.
이 말은 불편하지만, 사실에 가깝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판단은 빨라지고,
설명은 줄어들고,
굳이 신경 써야 할 사람의 수가 확 줄어든다.
“이건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지금은 어쩔 수 없어.”
“나만 손해 볼 수는 없잖아.”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말들은
대부분 꽤 설득력 있다.
윤리를 어기면
생각해야 할 변수가 줄어든다.
누구를 배려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지,
이 선택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굳이 끝까지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효율만 남기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리를 어긴 선택은
대개 “편하다”는 감각으로 기억된다.
고통스럽지 않고,
생각을 많이 요구하지 않고,
결과도 빠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윤리 이야기가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라는 질문은
항상 정직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음이 불편해도
익숙해질 수 있다.
특히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더 그렇다.
처음 한 번은
찜찜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조금 덜하다.
세 번째부터는
굳이 생각하지 않게 된다.
편해진다는 말은
감정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감정에 익숙해진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윤리를 어기면 더 편해진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이 거짓이라고 말하면
이 이후의 생각은
아무 데도 닿지 않는다.
대신 묻고 싶었다.
그 편함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윤리를 어긴 선택은
대개 단기적으로 보상한다.
시간을 아껴주고,
에너지를 덜 쓰게 해주고,
경쟁에서 앞서게 만든다.
그래서 그 편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선택에서도
같은 기준을 쓰고 싶어진다.
“한 번 괜찮았으니까.”
“이번에도 문제 없을 거야.”
이때부터
선택은 점점 쉬워지고,
기준은 점점 단순해진다.
편함은
선택의 이유가 아니라,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 지점이
나를 오래 붙잡았다.
윤리를 어기면
편해지는 건 사실인데,
그 편함은
왜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사람을 데려가는 걸까.
왜 한 번의 편함은
다음 편함을 요구하고,
다음 편함은
조금 더 큰 편함을 요구하는 걸까.
윤리를 어긴 선택이
언젠가 불편해질 거라는 말은
너무 막연하다.
그렇게 말하면
지금의 편함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윤리를 어겼을 때의 편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채,
그 편함이
어떤 구조를 만들어내는지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졌다.
편함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 편함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해지는가다.
이 이야기는
아직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다만 이 질문 하나는
여기서 남겨두고 싶다.
윤리를 어겨서 얻은 편함은
정말로
그 선택 하나의 결과일까,
아니면
그 다음 선택까지
미리 포함하고 있는 감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