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생각보다 빨리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어른이 준비한 도덕 문장보다
항상 먼저 도착한다.
“왜 그건 하면 안 돼?”
“다른 애들은 다 하는데?”
“안 들키면 괜찮은 거 아니야?”
이 질문들 앞에서
나는 자주 멈췄다.
왜냐하면
정직하게 답하면
내가 해왔던 많은 말들이
갑자기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쁜 일이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이 말들은
아이를 잠시 멈추게 할 수는 있어도,
아이의 생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는 못했다.
아이들은
선과 악이라는 말을
정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조건을 본다.
왜 안 되는지,
언제 안 되는지,
누구에게 안 되는지,
그리고 정말로
항상 안 되는지.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대화는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
“근데 엄마,
그렇게 했는데
더 편했어.”
이 말은
도전이 아니라 관찰에 가깝다.
아이는 이미
효율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사실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선과 악으로는
이 지점을 통과할 수 없다는 걸.
아이에게
“그래도 착하게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아이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은
정말로 더 편하고,
정말로 더 빠르며,
정말로 별일 없이
지나갈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아이를 설득하려는 말을
잠시 내려놓았다.
대신
아이의 말에
동의하는 데서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더 편할 수 있어.”
이 문장을 말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장을 말하지 않으면
이후의 대화는
모두 공허해진다.
아이와의 대화에서
윤리는
항상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
아이의 경험은
이미 윤리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윤리를 ‘옳음’으로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윤리를 ‘선택의 결과’로
말해보기로 했다.
“근데 말이야,
그렇게 편한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
이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예언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오래 생각해본 구조였다.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이
항상 다음 선택으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
숙제를 한 번 미뤄봤던 아이는
다음에도 미루고 싶어지고,
한 번 예외를 허용받은 아이는
그 예외를 기준으로 삼는다.
윤리도 다르지 않다.
한 번 어겨서 편했다면,
다음에도 같은 방식을
쓰고 싶어진다.
이 지점에서
선과 악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선택이
너를 어디로 데려가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나는
그 설명을 하기 위해
내가 먼저
끝까지 생각해봐야 했다.
윤리를 버린 선택이
정말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그 끝에서
나는 어떤 말을
아이에게 하게 되는지.
선과 악은
아이를 잠시 멈추게 할 수는 있어도,
아이의 사고를
책임질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설득하는 대신,
아이와 같은 질문을
붙잡아보기로 했다.
“이 선택을
다음에도 또 할 수 있을까?”
“이걸
다른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
윤리는
그 질문들 끝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