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는 늘 손해처럼 보인다.
이건 오해가 아니라, 실제 체감에 가깝다.
윤리를 지키는 선택은
대개 느리고,
불편하고,
설명이 길어진다.
반대로 윤리를 어긴 선택은
빠르고,
간단하고,
결과가 즉각적이다.
그래서 윤리는
항상 비교의 자리에서 진다.
특히 지금 당장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더 그렇다.
나는 한동안
윤리가 왜 이렇게
불리한 조건으로만 등장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지키라고 말하면서,
왜 지키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을까.
그러다 문득
기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리는
같은 게임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효율은
즉각적인 결과를 묻는다.
지금 이 선택이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이득인지,
얼마나 덜 손해인지.
윤리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 선택을
다음에도 반복할 수 있는지,
이 선택을
남에게 권할 수 있는지,
이 선택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는지.
문제는
이 질문들이
지금 당장의 상황에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리를 지키면
당장 얻는 것이 없다.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분명하다.
시간을 잃고,
기회를 놓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그래서 윤리는
언제나 손해처럼 보인다.
보상이 늦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상이 늦다는 말은
보상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보상은
측정하기 어렵고,
비교하기 어렵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윤리를 지킨 선택의 보상은
대개 이런 형태로 온다.
설명을 줄일 수 있다는 것.
기억을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상황에 따라
기준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 보상들은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손해처럼 보인다.
효율은
외부의 결과를 축적한다.
윤리는
내부의 기준을 유지한다.
그래서 둘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는 순간,
윤리는 항상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윤리를 손해라고 느끼는 순간은
대개 이런 때다.
“이번만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아무도 모를 텐데.”
“이 정도는 다들 하는데.”
이 말들은
지금의 손해를 피하게 해준다.
대신
다음 선택을 위한 기준을
조금 낮춘다.
윤리는
이 지점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번 한 번의 손해를
감수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윤리는
항상 불리한 역할을 맡는다.
지금의 이득을
미루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순간
이렇게 질문을 바꾸게 되었다.
윤리는 정말로 손해일까,
아니면
손해처럼 보이는 역할을
의도적으로 맡고 있는 걸까.
윤리는
당장의 결과를
경쟁하지 않는다.
대신
선택의 기준이
계속 유지되는지를 본다.
그래서 윤리는
항상 마지막에 평가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평가되는 것들은
늘 손해처럼 보인다.
이 회차에서
윤리를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말은
정직하게 남기고 싶다.
윤리는
손해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선택이다.
그래야
지금의 이득을 넘어서는
질문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그 손해를 감수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손해를 피하기 위해
어떤 기준을 내려놓게 되는가다.
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회차에서는
그 기준이 내려가는 순간,
어떤 선택들이 가능해지는지
조금 더 가까이서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