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함이 성립하지 않는 선택의 조건
8화
당당하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은 왜 틀릴까?
윤리를 어긴 선택을 두고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그냥 당당하면 되잖아.”
숨길 필요도 없고,
거짓말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떳떳하면
문제 될 게 없다는 말.
이 말은
논리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는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윤리를 어긴 선택 앞에서
이 말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당당하다는 건
그 선택을
공개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누가 물어도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그대로 따라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윤리를 어긴 선택이
대부분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렇게 했어.”
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너도 그렇게 해도 돼.”
라고 말할 수는 없다면
그 선택은 이미
당당할 수 없는 선택이다.
당당함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 가능성의 문제다.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권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윤리를 어긴 선택은
자주 멈춘다.
그래서 당당해지기 위해
사람들은
선택을 바꾸는 대신
이야기를 바꾼다.
“내 상황은 달랐어.”
“그땐 어쩔 수 없었어.”
“너는 몰라도 돼.”
이 말들은
당당함의 표현이 아니라,
당당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기 위한 말에 가깝다.
윤리를 어긴 선택은
당당해질 수 없어서 숨겨지는 게 아니라,
숨겨야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당당해질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비난이 아니다.
이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윤리를 어긴 선택은
대개
나에게만 허용된 예외이기 때문에
공개되는 순간
그 예외가 무너진다.
그래서 당당함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조건이 된다.
처음부터
당당할 수 있는 선택만이
끝까지 당당할 수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아이들을 다시 떠올렸다.
아이에게
“엄마는 이렇게 살고 있어.”
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너도 이렇게 살아도 돼.”
라고는 말할 수 없는 선택.
그 선택 앞에서
나는 당당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이건 밖에서는 말하지 마.”
라고 덧붙여야 한다면,
그건 이미
당당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다.
윤리를 어긴 선택은
자기 자신 앞에서는
당당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타인의 기준 위에 올려놓는 순간,
당당함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당당하면 되지 않나?”라는 말은
윤리를 어긴 선택을
끝까지 따라가보지 않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당당함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기준의 문제다.
나는 더 이상
당당해지고 싶어서
윤리를 선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끝까지 말해도 괜찮은 선택,
아이에게도,
타인에게도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선택을
버리지 않고 싶을 뿐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이 질문으로 이어가려 한다.
윤리를 어긴 선택은
왜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더 큰 통제와
더 많은 효율을
요구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