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호흡기를 떼기 전 아들에게 건넨 마지막 속삭임
원래 우리의 계획은
완벽했다.
첫째 똘이와 3년 터울.
경제적인 상황, 나의 체력,
아이들의 정서적 유대감까지 고려한
INTP인 나만의 빈틈없는 설계였다.
하지만 인생은
단 한 번도 내 계획대로
순순히 흘러가 준 적이 없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GBS(B군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신생아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두 달.
그 작디작은 몸에 호스를 꽂고
기계음 속에 파묻혀 버티던 아이는
결국 우리에게 이별을 고했다.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저으시던 날.
나는 아이의 산소호흡기를 떼기 직전,
마지막으로 아이의 귓가에 입을 대고
주문을 걸듯 속삭였다.
"엄마 아들로... 다시 태어나 줘.
알았지? 꼭 다시 와야 해.
엄마가 기다릴게."
그건 기도가 아니었다.
신에게, 혹은 운명에게 건네는
어미의 처절한 '거래 제안'이었다.
화장터에서 아이를 한 줌의 재로 뿌리고
돌아서던 길.
남편은 핸들을 꽉 쥐며 말했다.
"집에 못 가겠어. 도저히 못 들어가겠어."
아기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집.
아기 냄새가 배어있을 그 공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짐 하나 없이
무작정 차를 몰아 남해로, 여수로 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배기
첫째 똘이를 뒷좌석에 태우고.
여수 밤바다를 보며 맥주를 마셨고,
다음 날엔 관광지를 돌며 사진을 찍었다.
"똘이야, 여기 봐! 김치!"
첫째가 불안해할까 봐,
우리는 가면을 쓴 광대처럼
입이 찢어져라 웃고 떠들었다.
속은 썩어 문드러져 재가 되었는데,
겉으로는 행복한 가족 연기를 해야 하는
그 모순된 시간이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올라오던 길.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혀와,
우리는 충동적으로
부여의 한 리조트에 차를 세웠다.
사건은 그날 밤 터졌다.
술기운이 오르자,
이성으로 꾹꾹 눌러왔던 댐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나는 남편의 멱살을 잡듯 매달리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데려와야 해...
우리 둘째, 빨리 다시 데려와야 해!"
남편은 내 몸이 상한다며,
제발 정신 차리라고 나를 말렸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약속했단 말이야!
산소호흡기 떼기 전에
엄마한테 다시 오라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불러야 해!"
평소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할 추태.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이성적인 떼쓰기였다.
하지만 그건,
자식을 잃은 엄마가 할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인 본능이었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한다.'
그 생각 하나가 내 뇌를 지배했다.
남편도 울고, 나도 울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새도 없이,
떠난 아이를 다시 부르는 의식을 치르듯
그 밤을 보냈다.
그리고 기적처럼,
정말로 아이가 다시 왔다.
내 몸이, 내 자궁이
출산의 데미지에서 회복되기도 전에
덜컥 셋째가 찾아온 것이다.
의사는 걱정했다.
"산모님 몸이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조산 위험이 커요."
상관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자궁이 버티지 못해
아이가 쏟아질까 봐
밥도 누워서 먹었고,
심한 입덧으로 위액을 토해내면서도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입덧 약 한 알을 먹지 않고 버텼다.
사람들은 미련하다고 했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도 지키는 거라고.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이건 단순한 임신이 아니라,
내가 신과 맺은 거래를
이행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내 뼈와 살을 내어줄 테니,
너는 숨만 쉬고 있어라.'
그렇게 열 달을 꽉 채우지는 못했지만,
뜨거운 심장을 가진 아이가
미숙아로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인큐베이터 속에 누운
그 붉은 핏덩이를 보며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왔구나. 약속 지켰구나."
나의 주문이 통했다.
나의 전쟁은 승리했다.
비록 그 대가로
내 몸은 '자궁탈출증'이라는
영광의 상처를 입고 무너져 내렸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날 부여의 밤은,
술에 취해 부린 추태가 아니라
엄마로서 가장 치열하게 사랑한 밤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