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아니오"라 했지만, 우리는 "예"라고 했다

빈말 섞인 위로 대신, 뼈 때리는 진실을 건네는 우정

by 담윤

"야, 다행이지 뭐야.

동네 병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정상이래.

그냥 애가 좀 얌전하고 느린 거래."

전화기 너머,

친구 제니의 목소리가 한 톤 밝아져 있었다.

제니는 나와 대학 동기이자,

딸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

사는 지역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육아 동지로서

매일같이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요즘 제니의 고민은

쌍둥이 중 첫째 딸아이였다.

학교에서 멍하니 창밖만 본다거나,

준비물을 자꾸 빠뜨린다는 이야기.

내 아들 똘이가 겪었던 것과

놀랍도록 비슷한 증상들이었다.

걱정이 된 제니가

큰맘 먹고 동네 소아과를 찾았는데,

거기서 "괜찮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거봐, 내가 너무 예민했나 봐.

의사 쌤이 아니라는데 내가 괜히...

이제 마음 놓고 지켜보려고."

보통의 친구라면,

보통의 엄마라면

여기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어머, 정말 잘됐다!

그래, 애들은 다 크면서 변하잖아.

마음고생 많았어. 이제 푹 자!"

그게 예의고,

그게 상식이고,

그게 '위로'니까.

하지만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강하게 경고등을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저건 그냥 느린 게 아니야.

내가 겪어봤잖아.'

나는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아니, 꼭 해야만 하는 말을 뱉었다.

"제니야. 내 생각은 달라.

다른 병원 한번 더 가봐."

"......어?"

"동네 소아과 말고,

대학병원이나 전문 센터로 가봐.

의사가 10분 봐서는 몰라.

조용한 ADHD는 티가 잘 안 나거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멀쩡하다는 애를 두고

굳이 병을 의심하는 친구라니.

자칫하면 "네가 내 자식 잘못되길 바라는 거냐"며

싸움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안다.

이게 얼마나 주제넘은

'오지랖'인지.

하지만 나는 침묵할 수 없었다.

"괜찮다"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아이의 행동 때문에

매일 밤 속을 끓이고 있을 제니를 아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치료 시기를 놓쳐서

아이와 엄마가 겪을 고통이

얼마나 큰지 내가 먼저 겪어봤으니까.

나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욕먹을 각오 하고 말하는 거야.

지금 네가 '괜찮다'는 말 뒤에 숨으면,

나중에 아이가 고학년 됐을 때

숨을 곳이 없어져."

다행히 제니는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는 ENTP였다.

내 말을 곡해해서 듣거나

감정적으로 서운해하는 대신,

그녀는 쿨하게 받아쳤다.

"하긴. 네가 똘이 키우면서

반 의사 다 됐는데, 네 말이 맞겠지.

알았어. 예약해 볼게."

한 달 뒤.

제니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야... 네 말이 맞았어."

소아정신과에서

대충 본 의사도 아니라며 돌려보낼것을

친구가 검사해달라 요구하며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제니의 딸 역시

'주의력결핍 우세형(조용한 ADHD)'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제니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처음엔 네 말 듣고 좀 찜찜했거든?

근데 막상 진단받고 약 먹기 시작하니까

애가 달라지는 게 보여.

학교생활도 훨씬 편해졌대."

"......다행이다."

"고맙다,.

네가 그때 딴지 안 걸어줬으면

나 그냥 '애 성격이려니' 하고 방치할 뻔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만약 그때 내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다행이다"라고 맞장구치고 넘어갔다면?

우리는 그날 웃으며 통화를 마쳤겠지만,

제니와 그 아이의 1년 뒤는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살갑게 공감해주고

같이 울어주는 F(감정형) 친구는 못 된다.

하지만

친구가 길을 잃으려 할 때,

욕을 먹더라도

멱살 잡고 지도를 쥐여주는 것.

빈말 섞인 달콤한 위로 대신,

쓰지만 몸에 좋은 직언을 건네는 것.

그것이 우리

T(사고형) 엄마들이 우정을 지키는 방식이다.

의사는 "아니오"라고 했지만,

우리는 엄마였기에 "예"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고집이

또 한 아이의 세상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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