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공포에 질린 멈춤(Freezing)'의 결정적 차이
초등학교 3학년 국어 시간.
원고지 쓰는 법을 배운 뒤, 선생님은 칠판에 큰 글씨로 주제를 적으셨다.
<주제: 주말에 있었던 일>
"자, 지금부터 30분 줄 테니
원고지 두 장 채워보세요. 시작!"
선생님의 힘찬 구령과 함께
교실 안은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거침없이 연필을 쥐고
빈칸을 채워 나갔다.
나는 그 소리가 마치 거대한
파도 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홀로 모래사장에 발이 묶인 기분이었다.
내 원고지는 10분이 지나도록 하얗게 비어 있었다.
선생님이 교실을 돌다가 내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선생님의 그림자가 내 원고지 위로 드리워지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톡, 톡. 선생님의 손가락이 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00아, 왜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딴생각하고 있었니?"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얼른 써야지. 친구들은 벌써 반이나 썼잖아.
주말에 뭐 했는지 기억 안 나?"
선생님은 내가 '하기 싫어서' 혹은 '기억이 안 나서'
안 쓰고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정반대였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서 입구(Input)가 막혀버린 상태였다.
'토요일에 엄마랑 마트 간 거 쓸까?
근데 마트에서 뭘 샀는지 다 써야 하나?
아니면 일요일에 TV 본 거?
그건 너무 쓸 게 없는데.
아, 동생이랑 싸운 거 쓸까?
그럼 내가 나쁜 아이처럼 보일까?
첫 문장은 뭐라고 시작하지?
날씨부터 써야 하나?
아니면 바로 사건부터?'
수십 개의 생각 풍선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 풍선들 중 하나를 낚아채서
원고지에 옮겨야 하는데,
내 뇌는 그 수많은 풍선들을
동시에 잡으려다 그만 과부하가 걸려버린 것이다.
컴퓨터로 치면 모래시계 아이콘만
뱅글뱅글 돌아가는 '응답 없음' 상태.
자동차로 치면 엑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아 엔진만 굉음을 내고
차체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
그게 바로 내가 겪던 얼어붙음(Freezing)이었다.
사람들은 조용한 ADHD 아이들이 멍하니
있으면 "공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공상이라는 낭만적인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선택의 공포라는 아주 현실적인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는 욕심,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는 불안감.
이 세 가지가 뒤엉켜 뇌의 회로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게으르다"는 말은 그래서 억울하다.
게으름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여유로움'이다.
하지만 얼어붙음은 '너무 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괴로움'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지 몰라도,
그 순간 내 속은 식은땀으로 젖어들고 있다.
결국 그날 나는 수업 종료 종이 울리기 5분 전에야,
부랴부랴 아무 말이나 적어 냈다.
'주말에 밥을 먹었다. 맛있었다. 끝.'
선생님은 내 엉성한 글을 보며 혀를 차셨다.
"거봐, 넌 할 수 있는데 안 하려고 해서 문제야.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보자, 응?"
그때 내가 만약 선생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선생님, 저는 안 하려는 게 아니라요.
머릿속에 신호등이 고장 난 사거리처럼 생각들이 꽉 막혀 있어요. 저에게 '빨리 해'라고 하지 마시고, 차라리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해 볼래?라고 길을 터주세요."
하지만 열 살의 나는 그 복잡한 뇌의 작용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네,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는 법을 택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더 '느리고 답답한 아이'가 되어갔다.
지금 내 아이가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멍하니 있을 때, 나는 화를 내기 전에 아이의 눈동자를 먼저 본다.
아이가 지금 딴세상을 여행 중인지,
아니면 반찬 가짓수 앞에서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몰라 길을 잃었는지
만약 아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면,
나는 조용히 숟가락 위에 반찬 하나를 올려준다.
"이거 먼저 먹어볼까?"
그 작은 도움 하나면,
멈췄던 아이의 세상은 다시 톱니바퀴를 돌리기 시작한다.
나에게도 그때, 그런 한마디를 건네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