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해봐"라는 말이 가장 무서웠다

선택지가 많아지면 시동이 꺼지는 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유가 아니라

by 담윤


학교에서 내가 가장 싫어했던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바로 미술 시간의 "자유화 그리기",

글짓기 시간의 "자유 주제",

그리고 체육 시간의 "자유 시간".


선생님이 "자, 오늘은 주제 없습니다.

너희가 그리고 싶은 거 마음껏 그려보세요!"

라고 외치면,

반 아이들은 "와아!"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환호성 속에서 나만 홀로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마음껏'이라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마음껏이지?

내 짝꿍은 벌써 스케치북에

거침없이 공룡을 그리고 있다.

뒷자리 아이는 우리 가족을 그린다.

아이들의 손은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연필을 쥔 채

하얀 도화지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가

걸려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풍경화를 그릴까? 아니야, 나무 그리기 어려워.

그럼 내 필통? 너무 시시해 보이잖아.

상상화? 주제가 뭔데? 우주? 바다?

만약 바다를 그렸는데 선생님이

주제가 없다고 실망하시면 어쩌지?'

수십, 수백 개의 선택지가

내 머릿속으로 폭격처럼 쏟아졌다.


보통 사람들에게 '자유'는 기회이자

해방이지만, 나처럼 불안도가 높은

'조용한 ADHD'에게 자유는 곧 '막막함'이자

'공포'였다.

우리의 뇌는 '선택'을 하는 데

남들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쓴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옷을 살 때도,

하물며 사소한 단어를 고를 때도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따지고 검열한다.


이걸 '판단 비용(Decision Cost)'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남들이 "그냥 아무거나 해!"라고 쉽게 말할 때,

우리는 그 '아무거나'를 찾기 위해

머릿속 도서관의 책을 전부 꺼내서

비교하고 분석하느라 진을 뺀다.


그러다 결국 에너지가 바닥나면,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전원을 꺼버린다.

그래서 나는 늘 시작하지 못했다.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잘하고 싶은데, '틀'이 없어서 무서웠던 것이다.

차라리 선생님이 "자, 오늘은 '사과'를 그리세요.

빨간 사과 하나를 도화지 꽉 차게 그리세요."라고

딱 정해줬다면,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완벽하게 색칠했을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광활한 자유가 아니라,

내가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레일(Rail)'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얘는 창의성이 없네."

"시킨 건 잘하는데, 알아서 하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네."

"능동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야."

그 평가들은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나는 내가 주도성 없는 바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00씨, 이번 기획안 자유롭게

한번 짜봐요"라는 말을 들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유롭다는 말은 내게

"네가 알아서 정글을 헤쳐나가 봐"라는

방치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보니,

내 아이에게서 그 모습이 보였다.

주말 아침, 아이에게 레고

한 통을 쏟아주며 말했다.

"자, ㅇㅇ아. 오늘은 엄마 터치 안 할 테니까

이걸로 만들고 싶은 거 다 만들어 봐!"

나는 내가 아주 쿨하고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창의력을 위해 '개입'하지 않는 엄마.

하지만 아이는 레고 조각들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

10분이 지나자 아이는 짜증을 내며

레고를 던져버리고는 드러누웠다.

"엄마, 재미없어. 안 해."

그 순간, 나는 아이를 혼내려다 멈칫했다.

아이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짜증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수백 개의 레고 조각들 앞에서

압도당한 아이의 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아이 옆에 앉아

레고 설명서를 펼쳤다.

그리고 첫 번째 페이지를 펴주며 말했다.

"아이야, 우리 이거 하나만 딱 만들어볼까?

여기 빨간색 네모 블록 있지?

이거랑 똑같은 거 하나만 찾아줄래?"

그러자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는 0.1초 만에 블록을 찾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찾았다!"

우리는 설명서대로 자동차 한 대를 완성했다.

아이는 성취감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자유롭게 던져뒀을 땐 무기력했던 아이가,

'구조(Structure)'를 만들어주자

날개를 단 듯 몰입하기 시작했다.

아아, 너도 그랬구나.

너에게 필요한 건 망망대해 같은 자유가 아니라,

헤엄칠 수 있는 안전한 수영장 레인이었구나.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너를 바다 한가운데

던져놓고 "왜 수영을 안 하니?"라고 다그쳤구나.

미안해.

이제 엄마가 널 넓은 곳에 그냥 두지 않을게.

네가 길을 잃지 않도록,

엄마가 먼저 작은 징검다리를 놓아줄게.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고,

그 돌 하나만 밟고 건너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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