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반복적인 삶에서 안정을 찾는가

새로운 자극을 쫓는 ADHD? 아니, 나는 '예측 가능한 내일'을 사랑하

by 담윤

ADHD 진단을 받고 나서

의사 선생님께 가장 먼저 물어본 말은 이것이었다.

"선생님, 저는 근데... 지루한 걸 꽤 잘 참는데요?

아니, 오히려 좋아해요."

우리가 흔히 아는 ADHD의

이미지는 '자극 추구형'이다.

새로운 장난감, 낯선 여행지,

짜릿한 모험을 찾아다니고,

반복되는 일상이나 루틴을

견디지 못해 몸을 배배 꼬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나는 매일 아침 똑같은 시리얼을 먹어야

마음이 편했다. 카페에 가면 늘 앉던

구석 자리에 앉아, 3년째 똑같은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출근길도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닌다.

새로운 길, 새로운 메뉴,

낯선 모임은 나에게 설렘이 아니라 '피로'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ADHD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나는 그저 '성격이 좀 보수적이고

재미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 같은 '안정 추구형(조용한) ADHD'에게

‘새로움‘이란 곧 '불확실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뇌는 새로운 식당에 가면

"와, 신난다! 무슨 맛일까?" 하고

도파민(쾌락 호르몬)이 솟구친다.

하지만 내 뇌는 새로운 식당 문을

여는 순간부터 비상벨을 울린다.

'주차는 어디다 하지? 자리가 없으면 어쩌지?

메뉴판이 복잡하면 뭘 고르지?

맛이 없으면 돈 아까워서 어떡하지?

화장실은 깨끗할까?'

낯선 환경이 주는 모든 정보가 내 뇌를 폭격한다.

그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을 처리하느라

뇌는 방전되어 버린다.

그래서 밥을 먹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을 대표해 주말 외식할 식당을 찾을때면 미리 모든 부분을 검색하곤 한다.


주차도, 메뉴도, 구성도, 화장실도, 가는 길도,

가게의 분위기도, 가성비도, 가장 좋은 자리도 온 블로그를 뒤져 파악한다.

가서 방전되기 싫으니까


반면, 늘 가던 식당, 늘 먹던 메뉴는 나를 안심시킨다.

맛이 보장되어 있고, 가격을 알고 있고, 주차장 위치를 안다.

'예측 가능함(Predictability).'

내 뇌는 바로 이 지점에서 도파민이 나온다.

짜릿한 쾌락이 아니라,

"아, 다행이다. 별일 없구나" 하는

깊은 안도감의 보상이다.

남들은 "지겨워서 어떻게 매일 똑같은 걸 해?"라고

묻지만, 나에게 반복은 지겨움이 아니라

'안전한 요람'이다.

세상의 소음으로 가득 찬

내 머릿속을 잠시 쉬게 해주는

유일한 휴식처인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나서,

나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아이를 다그쳤다.

아이는 꽂힌 애니메이션이 있으면

대사를 다 외울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돌려봤다.

"아들아, 저거 지겹지도 않니?

다른 만화 좀 봐.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나는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준답시고

새로운 키즈카페, 새로운 체험 학습장을 끌고 다녔다.

아이가 구석에서 쭈뼛거리고 있으면

"가서 좀 놀아!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하며

등을 떠밀었다.

아이는 그때마다 울상을 지으며

내 다리 뒤로 숨었다.

그건 반항이 아니었다.

"엄마,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무서워요.

내가 아는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라는

구조 신호였다.

아이가 똑같은 만화를 계속 보는 이유는,

그 만화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해도

곧 구해질 거라는 걸 알기에,

아이는 마음 졸이지 않고 편안하게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 '예측 가능한 세계' 속에서

아이의 불안한 뇌는 비로소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거다.


그걸 "지겹다"고, "고집부린다"고 핀잔을 주다니.

정작 나도 매일 똑같은 커피만 마시고,

드라마의 결말을 먼저 알고 난 상태에서

정주행 하길 좋아하면서 말이다.

오늘 저녁, 아이가 또 식탁에서

"엄마, 나 어제 먹은 카레 또 줘"라고 말한다.

예전 같았으면 "영양 불균형 와.

다른 반찬도 좀 먹어"라고 잔소리했을 테지만,

오늘은 군말 없이 카레를 데워준다.

뜨끈한 카레 그릇을 받아든 아이의 표정이

한없이 평온해진다.

그래, 너도 지금 '충전' 중이구나.

낯선 세상에서 하루 종일 긴장했던

너의 안테나를, 익숙한 맛으로 잠재우고 있구나.

"맛있어?"

"응, 최고야."

우리는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모자(母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떤가.

우리는 새로운 자극보다,

서로의 곁에 변함없이 있어 주는

이 익숙한 온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을.

그러니 아들아.

네가 원한다면 내일도,

모레도 엄마는 똑같은 카레를 끓여줄게.

네 세상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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