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느린 행동 뒤에 숨은 '망설임'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다그쳤던 이
엄마들은 흔히 말한다.
"첫째는 나를 닮아서 짠하고,
둘째는 남편을 닮아서 쿨하다"고.
내 아이를 키우며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내 아들은 나를 닮았다.
생김새만 닮은 게 아니라,
기질까지 무서울 정도로 똑같다.
생각이 많아 행동이 굼뜬 것,
낯선 사람 앞에서 입을 꾹 다무는 것,
사소한 실수에도 세상이 무너진 듯 자책하는 것.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편이 느긋하게 "애가 그럴 수도 있지,
기다려줘"라고 말할 때면,
나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지금 안 고치면 평생 저래!
사회 나가서 저러면 무시당한다고!"
사실 그건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30년 전의 나 자신에게,
그리고 지금도 변하지 못한 나에게 지르는 비명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아이가 등원 준비를 하며
양말 통 앞에서 5분째 서 있었다.
"엄마, 오늘 체육 시간인데 무슨 양말 신어야 돼?
흰색? 아니면 줄무늬?"
그 사소한 질문이 내 뇌관을 건드렸다.
시간은 흐르는데, 고작 양말 하나
못 고르고 쩔쩔매는 꼴이라니.
순간 내 머릿속에서 '답답하다'는 감정이 폭발했다.
"야! 아무거나 신어! 그게 뭐라고 고민해!"
내 고함 소리에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에 잡히는 대로 짝짝이 양말을 신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의 축 처진 등 뒤에 대고,
나는 씩씩거리며 생각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답답해?'
그러다 문득, 현관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잔뜩 찌푸린 미간, 불안한 눈빛.
거울 속의 여자는 방금 나간 아이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낸 게 아니었다.
나는 '나의 그림자'를 보고 화를 낸 것이었다.
평생 나를 괴롭혀온 '결정 장애', '소심함', '느린 속도'.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감추고 싶었던 내 단점들이,
사랑하는 아이에게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으니까.
'너만은 나처럼 살지 마.
너만은 빠릿빠릿하게, 자신감 있게 살아.
나처럼 고민만 하다가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나처럼 남들 눈치 보느라 에너지 낭비하지 마.'
그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이었다.
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되지 못한 완벽한 나'로
고쳐 쓰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가 양말을 못 고른 건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체육 시간에 친구들이 짝짝이 양말을 보고 놀릴까 봐,
선생님한테 혼날까 봐,
너무 잘하고 싶어서 신중했던 것뿐인데.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정작 아이의 편이 되어주기는커녕
가장 무서운 심판관이 되어 몰아세웠다.
"엄마, 나는 그냥... 틀리기 싫어서 그랬어."
하원 길에 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건 30년 전, 내가 우리 엄마에게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이었으니까.
나는 그 길로 아이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네가 느린 게 아니라
신중한 건데, 엄마가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아들아.
엄마는 네가 나를 닮아서 싫었던 게 아니야.
네가 나처럼 상처받을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먼저 소리를 질렀던 거야.
세상이 너를 "답답하다"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단단하게 만들면
덜 아플 거라고 착각했어.
하지만 그건 틀렸어.
상처받은 엄마가 아이를 치유할 수는 없어.
내가 나의 느림을 먼저 용서하지 못하면,
너의 신중함도 사랑해줄 수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너를 보면 자꾸 내가 보여서 화를 냈던 날들.
이제는 그 거울을 닦아보려 해.
거울 속의 나도, 내 앞의 너도.
우리는 조금 느리지만,
누구보다 깊게 생각하고,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려 깊은 사람들이니까.
이제는 화내는 대신,
같이 손잡고 천천히 걸어가 줄게.
나를 닮아줘서, 사실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