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게 아니라, 안전하고 정확하게 가고 싶은 우리의 본능
나는 평생 나 자신이 '고장 난 스포츠카'인 줄 알았다.
남들은 시동 걸자마자 "부릉!" 하고 튀어 나가는데,
나는 엑셀을 밟아도 차가 쿨럭거리고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기름이 없나? 엔진이 썩었나? 왜 나만 이렇게 출발이 안 되지?
그래서 나는 나를 미워했다.
남들이 100미터를 10초에 달릴 때,
혼자 출발선에서 얼어있다 뒤늦게 출발하는
내가 한심했다.
세상은 스피드를 원했고,
나는 그 속도전에서 늘 낙오자였다.
그런데 ADHD에 대해 공부하고,
내 아이를 관찰하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고장 난 스포츠카가 아니었다.
나는, 그리고 내 아이는 처음부터
'디젤 엔진(Diesel Engine)'을
달고 태어난 것이었다.
휘발유 차는 시동을 걸면 바로 출발할 수 있다.
가볍고 빠르다.
하지만 디젤 차, 특히 덩치가 큰 트럭이나 버스는
다르다.
반드시 '예열(Warming up)'의 시간이 필요하다.
엔진이 충분히 달궈지기 전까지는 덜덜거리고
소리만 요란할 뿐,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예열이 끝나고 탄력을 받으면 어떤가?
그 무거운 짐을 싣고도 끝까지 산을
넘어가는 무서운 뒷심을 발휘한다.
나와 내 아이가 겪는 '느림'의 정체는
바로 이 예열 시간이었다.
주말 오후,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에 갔다.
다른 아이들은 들어가자마자 "와!" 소리를 지르며
트램펄린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내 아이는 입구에 서서 가만히 안을 둘러본다.
어디에 미끄럼틀이 있는지,
형들은 어디서 뛰어다니는지,
내가 부딪힐 위험은 없는지.
예전 같았으면 "어서 가서 놀아!
시간 아까워!"라고 등을 떠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아이는 지금
'데이터를 수집 중'이라는 것을.
이 낯선 공간이 안전한지,
내가 놀아도 되는지,
어디가 재미있는지.
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고성능 레이더가
윙윙 돌아가며 정보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석'이 끝나야 비로소 아이의 엔진은
예열을 마친다.
10분이 지났다.
충분히 탐색을 마친 아이가 드디어
신발을 벗고 뛰어 들어간다.
그리고 누구보다 신나게,
하지만 누구보다 안전하게 논다.
위험하게 노는 형들을 피해 다니고,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지 않고,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온전히 즐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의 느림은 '신중함'의 다른 말이었구나.
우리는 겁쟁이가 아니라, '안전제일주의자'였구나.
이 세상에는 빨리 달리는 스포츠카도 필요하지만,
묵묵히 짐을 싣고 달리는 트럭도 필요하다.
스포츠카가 1초의 승부를 겨룰 때,
우리는 10년의 안전을 생각한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뛰어들었다가 사고를 내는 대신,
돌다리를 백 번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수가 적다.
한번 시작한 일은 깊이 파고든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위험을 감지하고,
남들이 놓치는 디테일을 발견한다.
이건 결함(Defect)이 아니라 기능(Function)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세상은 자꾸 너에게 "빨리빨리"를 요구할 거야.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속도가 능력이라고 말할 거야.
그때마다 너는 네가 뒤처진다고 느낄지도 몰라.
하지만 기억해라.
너의 엔진은 느린 게 아니라 '정교한' 거야.
네가 멈춰 서 있는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더 멀리 가기 위한 '도약의 시간'이야.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
남들이 벌써 저만큼 앞서가도 불안해하지 마.
너는 충분히 예열된 뒤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너만의 속도로,
가장 안전하고 멋지게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
엄마는 이제 네가 출발선에서
머뭇거려도 재촉하지 않을 거야.
네 엔진이 뜨거워질 때까지,
그 옆에서 가만히 부채질을 해주며 기다려 줄게.
우리는 느림보 거북이가 아니라, 단단한 장갑차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