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너를 위해 '안전한 울타리(Structure)'

"알아서 해" 대신 "이거 먼저 해볼까?"라고 물어봐 주는 것의 기적

by 담윤

"아들, 방 좀 치워. 엉망이잖아."

주말 오후, 나는 아이의

방 문을 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닥에는 책과 장난감, 옷가지가

뒤섞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이는 침대 구석에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응, 알았어."

대답은 잘한다. 하지만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방은 그대로다.


아이는 여전히 만화책을 보고 있거나,

방 한가운데 멍하니 서서 장난감 조각 하나를

만지작거릴 뿐이다.

결국 내 인내심이 바닥난다.

"너 엄마 말 무시해? 치우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그대로야?"

아이는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며 말한다.

"치우려고 했는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때는 그 말이 핑계인 줄 알았다.

하기 싫어서 꾀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ADHD인 나의 뇌를 이해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이에게 그 방은 '더러운 방'이 아니라

'거대한 카오스(혼돈)의 덩어리'였다는 것을.


일반적인 뇌는 "방을 치워라"라는 명령을 받으면

자동으로 할 일을 쪼갠다.

1. 책을 꽂는다.

2. 옷을 빨래통에 넣는다.

3. 장난감을 상자에 담는다.

이 과정이 순차적으로 착착 진행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조용한 ADHD'의 뇌는 다르다.

"방을 치워"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물건이

한꺼번에 뇌를 공격한다.


책도 치워야 하고,

옷도 주워야 하고,

저기 굴러다니는 연필도 줍고 싶고...


모든 정보가 '중요도'의 차이 없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우선순위(Priority)를 정하는 필터가 고장 난 것이다.

그러니 아이는 방 한가운데 서서

압도당해 얼어붙어(Freezing)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전략을 바꿨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치워!"라는 호통이 아니라

혼돈을 질서로 바꿔줄 '구조(Structure)'와

'가이드(Guide)'였다.

다음 날, 똑같이 어지러운 방 앞에서

나는 다르게 말했다.

"아들, 우리 딱 하나만 하자.

바닥에 있는 파란색 블록만 주워서 통에 넣어볼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식간에 파란색 블록들을 주워 담았다.

미션이 너무나 명확하고 쉬웠기 때문이다.

"잘했어! 이번에는 입었던 옷만 골라서 빨래 바구니에 던져볼까? 농구 시합처럼!"

"좋아!"

아이는 신이 나서 옷을 던져 넣었다.

그렇게 하나씩, 아주 구체적으로

지시를 쪼개주자 아이는 춤추듯이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30분 뒤, 방은 깨끗해졌고

아이는 성취감에 뿌듯해했다.

"엄마, 나 청소 잘하지?"

나는 그동안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고 있었다.

수영도 못하는 아이를 바다에 던져놓고

"알아서 육지까지 헤엄쳐 와"라고 했던 꼴이다.

아이에게는 튜브가 필요했고,

잡고 갈 밧줄이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구조화(Structuring)'다.

막막한 세상의 과제들을 아이가 소화할 수 있는

'작은 한 입 크기'로 잘라주는 것.

주관식 문제를 객관식 문제로 바꿔주는 것.


"뭐 먹을래?" (X) "카레 먹을래, 짜장밥 먹을래?" (O)

"숙제 해." (X) "수학 학습지 딱 한 장만 먼저 풀까?" (O)

"준비 빨리 해." (X) "양말부터 신을까, 가방부터 챙길까?" (O)

어떤 사람들은 이걸 '과잉 보호'라고 할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엄마가 하나하나 떠먹여 줄 거냐고.

하지만 나는 믿는다.

지금은 엄마가 울타리를 쳐주지만,

이 경험이 쌓이면 언젠가 아이 스스로

마음속에 울타리를 짓게 될 거라고.

"아, 일이 너무 복잡하네? 일단 책상부터 정리하고 시작하자."

이렇게 스스로 혼란을

잠재우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알아서 해"라는 말을

내 사전에 지워버렸다.

그건 자유를 주는 말이 아니라,

방치하는 말이었으니까.

대신 나는 아이의 네비게이션이 되어주기로 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잃지 않도록,

"여기서 우회전이야", "지금은 잠시 멈춤이야"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있는 한, 아이는

더 이상 혼돈 속에서 길을 잃고 울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만든 안전한 구조 속에서,

아이는 비로소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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