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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답안지 분실 사건

by 김근상

때는 1989년 봄이다. 내 나이 30살 정말 좋은 시절이다. 지금도 간혹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다. 나는 총각 시절 유원지로 유명한 청평에 살았다. 데이트 장소가 주로 서울이었기에 서울 영등포에 살고 있는 작은 누님 댁에 와서 자곤 했다. 그날도 어린이날과 일요일이 겹친 연휴였기에 서울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당시 학생 시험 성적처리는 지금처럼 답안지 카드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마킹하여 답안지 리더기로 채점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교사가 각자의 답안지 양식(A4)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 후 4지선답을 고르게 한 후에 ○, × 로 손 채점했다.

나는 시험이 끝나면 시험답안지를 집에 가지고 와서 채점하곤 했다.

그날도 서울 누님 댁으로 가기 위해 춘천발 가평, 청평을 경유해 상봉터미널까지 가는 빨간 시외버스를 탔다. 가방 속에는 6개반 답안지철을 가지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너무 졸렸다. 그래서 단잠을 청했다. 한참 후 꿈나라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기사 아저씨가 나를 깨웠던 것이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만 있었다. 내가 탄 버스가 막차였기에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나는 엉겁결에 일어나 좌석 위 짐칸에 가방 올려놓은 것을 깜빡하고 그냥 내렸다. 청량리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야 했기에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허겁지겁 가던 중 뭔가 어깨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아뿔사! 이를 어째!!!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참! 이것 큰일 났다! 답안지를 분실하면 학생들은 재시험 봐야 하고 나는 사유서를 써야 했고 출제를 다시 한번 해야 하는 수고로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권위주의 시대라 호랑이 같았던 교장, 교감 선생님께 불려 가 엄청 혼나는 것은 당연했고 동료선생님들에게 얼마나 죄송한 일인가. 또한 죄없는 학생들은 다시 공부해서 시험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어떡하든 찾아야 한다. 나는 시외버스사무실로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지금 차가 저쪽에 있으니 찾아보라고 하였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내가 타 온 행선지 표지판이 있는 버스만 찾으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버스마다 그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차들은 목적지에 도착한 후 그 플라스틱 표지판을 뽑는다는 것이다. 다음날은 다른 목적지를 간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상봉동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는 이 버스의 출발지와 경유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시외버스 모두를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탔던 버스의 좌석번호도 기억나지 않았다. 버스 가운데쯤 왼쪽만 기억났다. 차 안이 어두웠기에 뒤까지 일일이 가서 찾아야 했다. 이렇게 하길 10대... 남은 차는 30여대 남았다. 한숨만 나왔다. 아! 이렇게 많은 차가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눈앞이 노랬다. 어떡하지! 이 많은 차를 어떻게 다 뒤지나! 이러다 보면 12시가 넘을 것은 불 보듯 뻔한데…

거기다가 자정이 되면 상봉터미널 전체는 암흑으로 바뀌고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못 찾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야속한 시계는 12시를 향하여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나는 결정했다. 이 차 하나만 더 찾아보고 끝내야겠다. 시간도 12시가 다 되었고, 나도 지쳤다. 마지막 차라고 생각하고 차에 오르니 뭔가 좋은 느낌이 들었다. 가운데쯤 갔을까. 어둠 속에 어떤 형체가 있었다. 아! 찾았다. 내 가방은 오히려 왜 이제야 왔느냐며 나를 원망하는 듯했다. 그 가방이 오히려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반가웠다. 아! 이젠 됐다. 십 년 감수했다. 쉽게 말해 용궁 갔던 토끼가 살아온 기분이랄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학생답안지를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

평생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으며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그중에 악몽 중에 축복이랄까.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한편으로는 등에 식은땀이 나지만 그래도 찾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니 웃음이 묻어난다.

(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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