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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행

by 김근상

내가 미국 여행을 하게 된 동기는 아들이 미국 시카고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석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그동안 쌓아온 마일리지를 이용해 비즈니스석을 저렴하게 끊었다고 좋아했다. 그동안 이코노미석만 이용하던 터였기에 비즈니스석은 너무나 편하고 안락했다.

12시간 비행 끝에 도착해 까다로운 입국 심사를 받았다. 난생처음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1:1 대화를 하니 말은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해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 내 눈에 그동안 어리바리하게 보였던 아들은 미국 사람과 유창한 발음으로 시원스럽게 대화하는 것을 보니 정말 대견스러웠다.

아들 오피스텔 근처 공원을 아내와 산책했다. 시카고라는 도시는 미시간 호수와 접했는데 호수가 너무 커서 바다 같았다. 호수 둘레 길은 자전거 타는 사람과 조깅하는 사람이 유달리 많았다. 시내 음식점에 가서 눈을 어디 다 둘지 몰라 당황했다. 내가 미국에 6월 초에 가 계절상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런데 미국 여자들이 브래지어를 차지 않아 가슴 3분의 1은 드러나 보였다. 한두 명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러했다. 모두 외모는 키가 크고 뚱뚱했고, 날씬한 여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왜 미국 여자들은 외출할 때 브래지어를 차지 않을까. 나에게는 놀랄만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을 시카고대 부스라고 불렀다. 그것이 공식 명칭이란다. 대학원 총장이 졸업생에게 주는 말씀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들은 경영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그 어려운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2년의 힘든 공부를 한 후에 석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학위 수여 식장은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첫 연설을 했다는 커다란 체육관이었다. 대학원 측에서 단상에 학위수여자마다 포토 라인 있어 그곳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졸업장과 석사학위를 총장은 한명 한명 악수하고 포옹을 하며 직접 수여하고 사진도 같이 찍어주었다.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미국을 간 김에 여행하기로 했다.

먼저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두 시간의 비행 끝에 밤늦은 11시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푼 뒤 늦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주변에 있는 멕시코 음식인 타코 파는 식당에 들렀다. 멕시코인이 만들어 주는 타코는 별미였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은 호화의 극치였다. 호텔마다 넓은 호수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의 특징을 잘 구현했다.

그랜드 케논의 여행은 패키지를 이용했다. 가이드 겸 운전해 주는 SUV인 디스커버리 승용차를 이용해 말로만 듣던 미국의 대표적인 여행지인 그랜드 케논을 갔다. 가는 길은 편도 1차선이고 차창 밖의 풍경은 집들이 보이지 않고 모래사막은 아니었지만, 풀도 질긴 것만 듬성듬성 보이는 끝없는 사막의 연속이었다.

그랜드 케논의 광경은 웅장하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강은 고등학교 때 배운 콜로라도 노래의 강이란다. 그랜드 케논의 최초모습은 광활한 평원이었는데 지각변동으로 인해 이렇게 놀랄만한 협곡이 되었다고 가이드는 말해주었다.

다음 목적지는 미국에서 제일 부자가 많고, 살기 좋은 자연환경과 기후를 가지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샌프란시스코였다. 1년 동안 기온이 13도~25도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4계절 중 가을만 1년 동안 있는 셈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부자들이 산다는 티뷰론을 아들은 안내했다. 항구에는 요트가 많이 정박해 있었는데 모두 개인 소유의 요트란다. 그곳 사람들은 여유가 있고 표정이 한결같이 밝았다. 내가 길을 건너려고 하는데 창문을 열고 ‘하이~’ 하며 웃으며 손을 흔들고 먼저 건너라고 수신호를 주었다. 집들은 모두 넓었다. 집안에 다양한 나무와 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 이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샌프란시스코에 가 살고 싶었다.

아내는 아들과 차를 빌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여행하기로 되어있고 나는 직장을 오래 비울 수 없어 먼저 돌아왔다. 아들은 우버 택시로 나를 공항까지 가는 택시를 잡아주고 나 홀로 공항에서 한국으로 오는 에어프랑스 비행기 티켓팅을 했다. 허기가 져 샌드위치와 과일 주스도 사 먹었다. 물론 대화는 모두 영어다. 내가 아는 단어를 이용해 손짓과 발짓을 하며 말했더니 모두 알아들었다. 참 신기했다. 사람은 굶어 죽으란 법은 없구나. 처음에 주눅이 들어 쭈뼛쭈뼛하더니 내가 한 말을 미국 사람이 알아들으니, 자신감이 뿜뿜했다.

기내 내 옆자리는 어머니가 일본계, 아버지는 미국계인 30대 여자가 타고 있었다. 처음엔 생김새가 동양인으로 보여 한국인으로 생각해 우리말로 말을 걸었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서투른 영어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5시간 정도를 이런저런 얘기로 무료함을 달랬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 때는 단어의 스펠링을 물었고 그녀는 스펠링을 또박또박 대답해 주어 알아차리게 했다. 지금 그녀와 대화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천공항에 내려 전화번호라도 교환할 걸 그랬나 좀 아쉬웠다.

사람은 인종과 종교, 언어는 다를지라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통하는 데가 있으며 모두 선하고 다정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25.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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