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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학현(鶴峴) 마을

by 김근상

오늘은 내 고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 고향은 전북 순창군 구림면 성곡리 학현이다. 주위에 군립공원 강천사와 회문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또한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이 가까이에 있다. 지금도 우리 마을은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에서 1km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학현(鶴峴)이란 마을의 유래는 학이 넘는 고개라 해서 지칭했다고 한다.

아내와 결혼하고 처음 갔을 때 아내는 어떻게 이런 산골짜기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는지 신기하다고 했다.

동네 마을 어귀에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정자나무라고 불렀다.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라 신성시했다. 마을 뒤쪽은 대나무밭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21 가구가 사이좋게 살았다. 그때만 해도 한 가족이 보통 부모를 포함해 6~10명이 좁은 집에서 올망졸망 어깨를 부딪치며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먹을 것이 아주 부족하여 모두가 가난하였지만, 행복지수는 높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 부탄과 같다고나 할까.

뒷산에 함박산이란 산이 있다. 그 산을 늦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초봄까지 지게를 메고 올라 다니며 삭정이나무와 갈퀴나무를 하였다. 겨울철에는 간밤에 눈이 왔을 때면 토끼를 잡는다고 동네 아이들이 모두 산을 이 잡듯이 촘촘하게 눈밭을 누볐다. 그때는 산에 나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멀었고 나무 밑에 있는 나뭇잎을 갈퀴로 모두 긁어서 나무 동을 만들어 지게에 져와 아궁이에 땔감으로 썼다.

뒷동산에는 두께가 한 아름 되는 금강송 나무 두 그루가 30m 간격을 두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남녀가 같이 진돌이라는 놀이를 했다. 그 옆에 경사가 완만한 잔디밭 묘지에서 야구와 축구를 하며 겨울철을 재미있게 놀다 보면 어머니들이 ‘00아 저녁 먹어’라고 불러댔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 무렵에는 깡통에 구멍을 뚫어 숯을 넣고 돌리곤 했다.

내 어린 시절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아이들끼리 게임을 많이 했다. 비슷한 또래 남자아이들만 족히 스무 명이 넘을 정도였다.

그런데 현재는 7 가구 11명이 살고 있다. 평균나이가 80세가 넘는다. 젊은 사람과 아이들이 없다. 앞으로 10년 정도 지나면 동네가 없어질까, 걱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학현을 사랑하는 모임인 ‘학사모’를 만들었다. 때는 암울한 코로나 터널을 빠져나올 무렵인 2023년도 봄이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00 아재, 00형이 주축이 되어 동네에서 어르신 잔치를 벌이기로 하였다. 고향 떠나 타지에 사는 사람을 모두 초대하여 동네 어르신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무대를 만들고 노래방 기기도 갖다 놓고 한 곡조씩 실력을 발휘했다. 동네가 왁자지껄하게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보세’ 하며 놀았다. 물론 수도권에서 버스 대절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르신들이 참 좋아하셨다. 이 같은 행사는 기금을 만들어 해마다 이루어진다.

올해로 3년째, 올해는 간소하게 광주와 순창에서 살고 있는 학사모 회원 4명이 동네 어르신들께 장어를 대접하셨다. 카톡방에 올라온 사진 속에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표정에 웃음꽃이 피어나 뿌듯했다. 내년에는 버스를 전세해 원년처럼 성대하게 하려고 기획하고 있다.

나는 이분들이 모두 천상병 님의 시 ‘귀천’처럼 ‘하늘나라에 가서 이 세상 소풍 끝날 때 즐거웠노라’고 말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모시기로 다짐해 본다.

(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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