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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윤리적 참견

나쁜행동은 항상 죄악으로 치부되어야만하는가?

by Zeugitai

인간의 본성은 심오하고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런 본성은 인류는 늘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하려는 관점을 취해왔다. 가장 유명한건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분법론이다. 종종 이런 질문을 사람들은 던진다. 인간은 원래부터 착한가? 나쁜가? 라고. 과학의 발전이 미비하던 시절에 인간의 성격을 평가하는 지표는 늘 도덕이나 윤리관이 중심을 차지했다. 인간의 심상 자체를 과학적 양태로 인정하기에는 외부의 상황이나 감정을 통해서 받아들이는것은 뇌과학적 느낌보다는 추상적이고 미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가정해보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느낌은 스스로를 과학적인 관점으로 감정의 변화를 분석하고 알아차리는것을 방해한다. 그런 한계점은 인지부조화를 유발한다.그래서 인간의 감정과 성격은 과학보다는 철학처럼 느껴진다. 다시 돌아와보면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으로 딱 잘라서 구분이 가능한가?

일단 질문의 전제부터가 틀렸다. 착하고 나쁜건 가장 보편적일수있는 개개인의 사회적인 해석일뿐이지 모종의 개념은 인간의 예측불허한 성격에서 불규칙적으로 추동될 뿐이다. 착하고 나쁘다는 기준이 무엇인가?

여기서 개인적으로 생각나는건 철학자 흄이 말하는 도덕 정념론이라는게 있다.

같고 일관된 하나의 감정이 느껴지는것 같아도 동시에 간접적으로 다른 반대의 감정을 내포하기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른 반대의 감정이란 간접 정념이다. 이러한 간접 정념은 직접적으로 느끼는 감정에 피력되어 발현한다. 예를들면 누군가 도와주고싶은 격한 감정을 느끼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그러한 도와주고픈 감정은 이타적이지않을수도있다. 왜냐면 격한 감정이 나 자신이 겪었던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트라우마로 인해서 도와줄 대상에게 그저 투영된것일수도있기때문이다. 이게 간접 정념의 작용으로 발생한 결과이다. 동일하게 발생하는 선하다고 일컬어지는 정념이 사실은 전혀다른 내면의 무의식에서 기반한것이라면 선과 악이라는 명확한 경계는 허물어지는것과 같다.

도덕 정념론으로 인해서 당대의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논쟁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현대에도 개인적으로 인간을 선 악으로 나누는 종교적 신앙관에서 벗어나지 못한게 많이 보인다. 나쁜행위를 한 사람을 무조건 악으로 보는것은 굉장히 협량한 판단이라고 본다. 나쁜행위를 하기까지의 악의 근원이 어디서 출발하는가? 사람의 본성? 유전적 기질? 그 사람의 의지? 모든것도 아니다. 악의 근원을 찾으려는 대중들에게 사회적으로 내재된 윤리의식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누군가 나쁜행동을 하면 이제는 과학적으로 봐야할 시대가 도래했다고본다. 도덕에 준하여 행위를 평가하고 정립하는 사회는 근현대에 매듭을 지었어야했는데도 여전히 윤리관과 퇴보적인 교조주의에 정체되어있는게 안타깝다.

도덕으로 인간을 판단했을때 도달하는 최종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보자.

사람을 주먹으로 때리는 나쁜행동을 하는 A가 있다. a라는 사람에게 대중들은 나쁘다는 평가를 내린다. 나쁘게 여겨질만한 근원점을 물어본다면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적인 관점으로 볼까? 절대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철저히 도덕적인 관점으로써 개인의 행위와 상황을 중심으로 서술하게된다. "주먹으로 때리다니, 화를 참지못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것은 나쁜행동이니 a는 나쁜놈이다" 라고 말이다. 결국 그 나쁜놈이라고 부르지만 최종적으로 나쁜행동을 할만한 원인이 "도덕적으로 나쁜 타인의 자아"에 경도되어지기에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원인은 사람의 뇌과학적 이론에서 찾는것이 아니라 "그 사람"자체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인간의 행동들을 서로 비난하는 이유도 위에서 기인한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피해를 준다면 적어도 원망이나 분노하기보다는 각자 서로가 느낀 감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심리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간파하려는 경향이 크다. 아니 최대한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는것이 내 인생에서 더 긍휼적이다. 인간의 성격은 뇌로부터 나오며 뇌는 과학이다. 환경에 따라 기질적 성격의 가변성이 크다는 부분 자체로는 인간에게 성격을 좋은방향아로 변화를 해야하는 책임괴 구실점이 된다. 하지만 성격을 바꾸려는 의지 조차도 뇌에 설계된 유전적 구조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마치 나의 의지인것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 역할을 하는것도 우리 뇌 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나쁜행동을 죄를 짓지않고 착한행동을 선택할 의지조차도 그 상황을 도덕적으로 극복한것 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뇌의 분노와 긴장을 담당하는 노르아드레날린이 감소했기에 의지로 이겨낸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원래 도덕이라는 무형적 개념은 인간의 과학적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주 요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도덕과 윤리같은 위선적이고 상투적인 것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런것들은 나에게 오히려 중압감과 적개심만 가져다준다. 인간은 본연의 성격 그대로 행동할 이유가 있다. 하찮은 도덕 군상따위와 타협할 이유가없으며 보다 더 독선적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은 그런걸 강조해서 각자의 성격을 사회에 요구되는 도덕 그 이상으로 초월해야한다고 본다. 그게 진정한 자아를 완성하는 길이다.그리고 도덕관점들이 고무되었던 역사나 시기의 공통된 부분들이 있다. 종교권력이 강했던 성문법 시대이다. 무질서가 범람하던시기에 도덕이 고무되었다면 신빙성이 있거니와, 오히려 무질서가 범람했던 시기에는 도덕보다 기존 질서와 도덕의 해체를 부르짖었던 때가 많다.현대에서도 도덕적 관점은 사회권력의 태상황 노릇을 하는 중이다. 모든 인간의 성격과 행동을 뇌과학으로 보는 심층적인 관점이 요구되어진다. 도덕보다 뇌과학이 일상에서 친숙하게 접근가능한 학문은 아니기때문에 도덕으로 인간 세상과 상호관계를 보는게 수월하기때문에 여전히 도덕적 관점의 위력은 지금도 잔류한다. 법정 재판위에 서도 판사는 죄수를 법감정 하에 도덕적 판단을 거친다. 뉴스에 누군가 사고를 쳐도 그 사람의 유전적 기질과 병리학적 원인을 알려고하기보다는 "사람" 자체를 도덕적 철학적 관점으로 혐오하는 시선이 만연하다. 게다가 사람들은 정신병과 죄를 분리시켜서 해석한다. 하지만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정신병은 일반인들과 다른 행동을 할수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비정형적 사고를 하기때문에 정상적인 생각이 차단되기에 이성적 판단을 할수없다. 그렇기에 죄를 짓는걸로 이어지는게 수순이다. 하지만 현대에 다루는 법 조차는 과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에는 정신병에 의한 매커니즘적 죄악은 용인하지않는다. 오직 "죄"로 분리시켜서 정신병은 별도료 참작동기에만 들어갈 뿐이다. 여전히 법 감정론은 근현대에 천착되어서 개개인을 종교재판대에 올리는중이다.

"죄"라는게 대체 뭘까? 해체주의 철학으로 "죄"라는 개념을 초읽기해보자.

죄는 원래 성경에서 다뤄지는 일종의 맥락같은거라고 보면된다(동양의 왕조에서도 개인의 악한 행위를 죄 라고 단정지은게 있었지만 그건 왕조 특유의 중앙집권체제에 규율적 특징이기에 그냥 넘어가자) 하느님의 권위 아래에 만인이 용서받는것을 명분으로 하기위해 수많은 인간의 본성과 행동들의 절반정도를 죄로 규정했다. 성경의 창세기 이후에보면 선악과 열매를 아담과 이브가 따서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이후부터 하느님아래 인간의 행동은 죄악이 무엇인지 정해지게되었다는게 기록이 되어있다. 성경도 역사를 변형시켜놓은 전집이다. 인간의 "죄"는 기독교가 탄생하기전까지는 없었다. 로마 시대때도 죄라는 개념으로 처벌한것이 아니라 로마법을 어겼기에 처벌한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사회적으로 "죄인"이라는 인식도 기독교 등장 이전에는 없었다. "죄"라고 불리우는 개념을 가장 근원적르로 깊게 파보면 과학이 없던 시절 인간은 각자 서로의 나쁜행위에 대한 원인을 찾지못하니 문제 해결을 할수없다. 따라서 "옳지못함"이라는 결론을 내려서 나쁜행동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단이 필요하다. 그렇게해서 과거부터 언어학적인 수단이 탄생했고. "죄악"이라는 뜻으로 부터 모든 인간이 나쁜행위를 하면 이제 "죄"라는 개념 하나로 치환시킬수있게되었다. 이것은 마치 도덕을 고양시키는 수단처럼 지금 현대시대까지 착각해왔지만 사실 엄청난 폭력이다. 행동은 행동으로 결론지어야한다. 어떤 행동이든 "죄"로 규정하는 순간 그런 행동들을 해결하거나 원인을 찾으려는 의지는 박탈되기때문이다. TV에서 누군가가 나쁜행동을 하고 뉴스에 나오는것을 보고 죄인이라고 욕하는 순간 범인의 행동 원인을 찾으려하지않는것도 위와 같은 예시이다.

학교애서도 군대에서도 모든 공동체에서도 자녀의 훈육 속에서도 "죄"라는 개념은 빠지지않고 등장한다.내가 자식을 가진다면 저런 단어는 학습시키지도 않을것이다. 그저 하지말하야 할 행동이라는 최소한의 자각만 일깨워주면 된다. 생활곳곳에 교리가 지배하고있다.

정리하자면 죄를 철학적으로 해체해본다면 "옳지못한 언동"이다. 그러면 옳지못하다는걸 판단하는 주체는 대중들이나 시대나 사회에 정형화된 통념이다. 그것들은 소위말해 "타당성"이라고 여겨지는것들이다. 그러나 타당성을 상쇄시킬정도로 기존의 통념에 반향적인 판단력이나 지혜를 가진 사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항해야한다. 적어도 거기에 해당이 된다면 학문을 열심히 쌓아서 비판할수있는 힘을 가지고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조류를 양산할수있어야한다. 그래야 자격이 생긴다고본다. 그게 흔히 말하는 양극단에 놓여져있는 학자나 전문가 집단들이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까지 진보한것이다.

난 그래서 보잘것없는 신념 하나를 가질것이다. 바로 누군가의 나쁜 행동을 "사회적 옳지못함"으로 부터 출발하는 "죄"로 이해하지않을것이라는 내밀한 다짐이다.

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들은 도덕,정의,질서 이다.

이제 위에 3가지는 오늘날 이렇게 바뀌어야한다. 관용,평등,자유.

물론 도덕은 인간의 본성을 지배할정도로 영향력있는 공동체의 "강령"이다. 그러한 강령이 사회적 규범을 만들수있는 모태가 되는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도덕 강령은 사라져야할때가 왔다. 인간의 본성을 심리학으로 분석하고 인지할수있다면 인류는 더더욱 진보해나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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