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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ugitai Mar 28. 2023

서광이 비추는곳은 대체 어디인가?

사회적 메트릭스를 파해지다.

누군가는 이런말을 듣는다. 욕심부리지마, 어차피 넌 평범해. 성공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다.라며.
하지만 개인이 남들따위에 규정될 이유라도 있는가?
남들은 역할로써 한 개인을 신뢰하지만 존재는 자신이 스스로 완성하는것이다. 부모도 불완전한 존재이다. 부모는 자식에게는 성숙한 자아를 찾으라며 종용하는것같아도 사실 그들또한 은폐되어있는 사회의 조잡한 메트릭스를 간파할수없는 연약한 구성원일뿐이다. 정말로인지, 사회는 말잘듣는 개인을 좋아할뿐, 주체성은 최대한 억압하고 개인의 저항의지를 매우 두렵게 여긴다. 그리고 주체성을 행할경우 수치심,소외감을 조성하며
만일 주체성을 거부하고 기꺼이 순종한다면 뒤이어 따라오는 "도덕적 양심"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이런식의 치밀하고 양분법적인 전략은 이미 개인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로 사용된다. 바로 "도덕률"이다. 도덕률은 사회 구성원이 불확실한 현재의 상태를 명확하게 예측할수있는 미래지향적 사고와 관련이 깊다. 아니, 의미 그 자체이다. 도덕은 불안정한 인격이 의존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지만 현명하고 명민한 개인이 그것을 이행하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터무늬없고 불합리하며 부족해보인다. 특히 현명한 개인에게는 도덕질서, 규범만큼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러한 부류에게는 생존하기위한 최소한의 필요관계를 충분히 지속하는것(예를들면 처세술,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서 대응요령,좋은척 연기해서 집단에 살아남아야하는 페르소나같은) 외에는 별다른 효용성이 없어보이기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주의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공존한다.



그리고 그들에겐, 자의식이 보편도덕보다 앞서는것만큼 고통스러운건 없기때문에 늘 비판하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지식을 접목시켜서 사회를 바라보거나 이상적 세계관을 꿈꾼다. 그들을 부정적으로 명명하자면 '반사회적인"이라는 꼬리표를 사람들이 종종 붙이곤한다. 특히 이러한 용어는 개인주의 서양과 집단주의 동양의 표현에서 차이를 보인다. 서양에게 반사회적이라는것을 뜻하는건 지극히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범죄현상이나 대규모 테러암시를 주로 나타내지만 동양은 집단의 생각과 불합치되고 마음에 들지않거나 사회에 위배되는 독단적인 성향을 누군가 조금이라도 지니고있다면 그것을 포괄하여 "반사회적인"이라며 개인을 재단하려든다. 조금이라도 개인의 관계성을 부정하려드는 태도에 마치 경멸하듯 시선을 감추지못하며, 입으로는 개성을 존중한다고해도 사실 그들만의 영역을 미리 정해놓은 "개성"이다. 이미 다양성을 말살하고도 스스로가 "민주적인" 미국처럼 서양처럼 "자유로운 국가"라는 흐려진 프레임이 한국사회에 남아있다. 마치 깨진거울임에도 억지로 맞춰서 그게 거울역할을 하고있다는 착각속에 한국사회는 골몰하듯 빠져산다. 미국이 한국사회에 자유라는 단어를 전달하면 한국은 "질서"로 쓰고 대답하는 나라이다. 미국이 "개방적" 혹은 "개인주의"라고 설득하면 한국은 이미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문화적 수용에 있어서 실상과 겉모습이 판이하게 보여지는 이유는 한국의 겉모습은 미국이 알아도 내부적 결함은 익히 공표되지못하기때문이다. 해석은 각자의 민족이나 국가의 몫이다. 한국 사회의 내부 모순점은 외부세계에 객관적으로 파악할수없는 이유는 한국인이 만족하는데에는 자유가 있다고 미리 선점 해두기때문이다. 더 자세히보면, 서로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 a와 b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b사회 구성원들은 사는데 그다지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단지 몇몇의 약간의 적응력이 미약한 누군가가 있을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적응을 하지못하는 그들은 자신 스스로의 문제점인거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내린건 a라는 사회 구성원들에 포함된 어떤인류학자였다는것이다. 그리고 그 학자는 인간 본위적 사고를 토대로 왜 적응을 할수없는지 매우 "심리학"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해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1번, a문화의 판단으로 본 편협하고 엉뚱한해석
2번, 그 학자의 잘못된 조사범위, 혹은 잘못 책정된 기준.
1번 2번 둘다 아니며 사실 답은 "해석 자체를 할수없음"이다.
정확히말하면 학술적 딜레마에 빠진다는것이다. 즉, 특정 집단내에 구성원이 무언가에 익숙해져있는만큼 판단할수있는 양식도 이미 거기에 동화되어있다. 아니, 명확하게 사회적 문제를 구분할수있는 경계는 희석되었다. 그와동시에 희석된 가치는 내가 사회문제를 파악해야만하는 결정적인 방법론이 중의적으로 그것과함께 피력되어있다. 한마디로 사회나 문화에 대한 비판과 해석의 도구인 동시에 그것을 실행하게된다면 비판 자체가 모순인것이다.  
예를들어보자, 한국 사회의 위계질서가 싫다. => 그래서 위계질서를 비판하기위해 요즘 현대 한국 젊은이들의 조금더 개방적인 통념을 토대로 근거삼아 비판해본다 => 하지만 쟁점은 그러한 젊은이들의 통념또한 기성세대 부모의 질서로부터 저항하고 새로운것을 창안했지만 구시대질서의 연장에 불과하다. 왜냐면 일종의 윗대로부터 학습된 대체물이다. 70년대 관료주의 특유의 엄격함과 위계질서를 반대하는것이 아니라, 부모님 세대들의 생각이 그저 "시대에 뒤쳐지는 가치관"이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과거와 지금의 전환기에 초점을 둔것일뿐, 집단주의 정서와 밀접하게 공유되는 위계질서임에도 그걸 타파하려는 어떠한 시도는 지금 한국사회에 거의 드물다. 대부분은 질서 저항이 아닌 "사실적 대안"과 "형태의 모방"을 택했기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무슨말이냐?
간단하고 미시적인 예를 들어보자. 과거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진로나 자아실현 향방에 대해 논하고 주장하는것에 대해 부모나 웃어른, 윗세대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예의가 없는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에서는 세대 개념은 사라졌다. 하지만 젊은층은 새로운걸 대체한다. 바로 "선후배 관계 구축"이다. 50년전에는 대가족끼리 친족 서열에 있어서 장인,장모,딸,아들,부인, 남편 과 같이 가족으로부터 위계가 결정되었지만 지금은 사회활동을 하게되는 대학교, 직장과 같은 "나이"라는 기준으로 비교적 간소화되었지만 부모세대의 위계를 변모한것뿐이다.
이렇게해서 이미 예전 사실을 거듭하여 현재의 사회나 문화를 보는 관점에 이미 포섭되어있다. 그리고 나아가 이런 현상이나 굴레의 순환으로인해 개인은 철저히 사회와 자신을 구분할수없게된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나 자신이 행동되어지는 원인인지 사회가 구현해놓은 어떠한 상황에 비롯되어 나에게 개입하는건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담지할수없다는것이다. 그래서 침묵하는 소수와 만족하는 다수의 개인들로 나뉜다. 여기서말하는건 남다르고 특별한 사고를 하는 가진 소수를 말하는게 아니다. 만족하는 다수로 인해서 소수는 "개인적 원인" "임상 심리학적인 문제점"으로 오판할 가능성이 높다는거다. 그래서 문화인류학적 맥락으로 보기보다는 개인의 정서와 관련된 심리나 사회직관을 배제하는 분석만을 위주로 평가한다는것이다. 그것도 사회적 메트릭스같은 문화가 아니라 지극히 오로지 "개인"만 본다는거다. 수많은 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개체화된 일원적 접근법에서 거시적인 맥락으로 볼수있도록 반드시 수정해야한다. 그래야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확장되어 인간이 아닌 원칙적 사회가 조직적으로 개인을 어떻게 침범하는지를 알수있다. 거기서부터 자유의 베일이 밝혀지고 어두워진 종막을 걷을수있는것이다. 다수의 만족은 가식적으로나마 묵인되어야만하는 타자간의 규칙으로부터 작동한다. 왜냐면 그렇게 따르고 복종하는것은 인간이라는 홍수속에 살아남을수있는 기로라도 트이는걸 다수의 개인들은 잘알기때문이다. 이것을 "기의"라고도 한다. 분명 낮설게 받아들이고 눈치채야할 불편부당한 의미들을 부단히 깨닿고 투쟁하기보다는 차라리 체념을 통한 일시적 만족을 선택하는건 어쩌면 다수라는 이름하에 군중속의 모든 악마들이다. 그 악마는 원망해도 힐난해도 지워질수없다. 왜냐면 그들또한 인간본성의 피해자이기때문이다. 적응되어있는만큼 불만도 인식할수없는 인간의 심리구조상, 그런건 극복하기 힘들다는건 이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여운이 남을정도로 심도깊게 읽었던 책이었다. 관계에대해서는 심리로 판단하지만 왜 개인의 문제점 앞에서는 철학에 기인하는 도덕으로만 보는건가를 고만하게 해주었다.


특히나 초경쟁사회 단계에 진입한 한국으로써는 너무나도 많은 모순율을 함축하고있다.  그래서 난 한가지 날선 반문을 던진다.
"대체 왜 경쟁은 누구나 해야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주입하지만 막상 개인이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순간에는 화합과 협동 그리고 타인의 의견만을 중요시하길 바라는가? 이다.  즉, 현실직시에 있어서 경쟁이 있다는 그 사실은 당연시되고 강요받는데 개인이 거기에 생존하려고 발버둥치고 부딪히고 고통에 사무칠때 만큼은 왜 항상 경쟁하려는 태도를 아니꼽게 보며, 그저 개인을 불만스럽고 독선적인 인격으로만 보는건가..
너무나도 선택적이고 위선적이다. 경쟁을 열심히 하려고 시도하는 개인은 성격이 문제라고, 이기적라고, 등 그들을 답답하게 보고,
그렇다고해서 경쟁을 회피하고 평범함을 원하는 개인에게는 또 다시 "경쟁사회는 당연한곳"이라고 말그대로 순수한 "사실"만을 강조한다.  

실질적으로 사회에 공정하게 동기화되어야할 요소들은 이미 가진자가 독점하고 그들사이에 편재되어있을뿐이다.
그리고 말잘듣는 개인을 잠재우기위해 도덕이 필요했던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도덕이 기능을 하지못한다는걸 잘 알고있는게 바로 지배층이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단어가 자생력을 발휘하는 이유를 반추적으로 봤을때 위에 "우리를 옭아매고있는 이런 구조적 원칙이 만들어낸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도덕이다" 처럼 구구절절 설명한 여러 이론이 차출된것이기에 설득력있어보이지만,
질문이나 논지를 거꾸로 뒤집어서 이렇게 의문을 품어본다면 해석이나 설득은 다음과같이 완전히 바뀐다.
 "도덕은 과연 개인에게 쓸모있을까? 혹은 보편 도덕은 왜 개인을 함부로 판단하려할까?"
라는 질문들은 개방적으로 질서에 저항하는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이미 "도덕"이라는 프레임안에서 고민하고 비판하는것이기에 이미 설계된 메트릭스의 노예가 된것이다. 이런 원리로 인간은 세뇌에 가까울만큼 지식에 익숙하다. 그러나 지식은 원래 낮설어야한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는 과정만큼은 내면적인 위화감과 저항을 겪어야만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사회가 할당하는 지식을 배우는 우리에겐 어릴적부터 전혀 낮설지도않으며, 마치 선험적으로 준거되어왔던 지도를 따라서 스캐치 하는듯하다.  그러나 이런것들은 모두 세뇌의 일환이다. 알아야할것도 아는것처럼 위장하고 숨겨야만 개인은 "말잘듣는 개인"으로 탈바꿈되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부정적인 시야에 민감한만큼 기존 질서에 몸부림치도록 설계 되어있다. 그걸 잘알기에 사회는 그걸 억누르면서 까지 지식이라며 개인을 속인다. 종교나 성문법이 생겨난 원리도 이것과 흡사하다.  중앙집권의 통합성이 저해된 중세시절만큼은 종교나 교리 교파는 개인을 위해서 역할을 다했다는부분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진정한 지식이란 매우 불투명하며 때때로는 엉뚱하며 누군가에겐 거북하기도 하다. 가령 이보다 더 중요한것은 지식 속에는 "알 필요조차 없어보이는것"이다. 그곳에 진짜 추구해야할 지혜가 숨겨져있다.
익숙하다고 여태 믿어왔던건 지식이 아니라 범사회적인 조직화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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