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일을 저질렀다.
제주 살이 15일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늘 아쉬움을 남기며 돌아오던 그곳을 기대와 무계획을 계획으로 달고 떠났다. 자매국수를 먹고 들어가라는 동생의 조언대로 저녁을 해결하고 들어서는 애월의 하늘은 서울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난 서둘러 사진을 찍어 스토리가 있는 제주의 하늘이라고 멘트를 날렸다. 대략 7년 전쯤 라디오를 통해 지인의 제주 살이 1년을 전해주는 앵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삶에 제주의 이야기를 더 보태고 싶었다.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른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이 걸렸다. 한 달 살이를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예약해둔 펜션을 찾아드는 길은 어렵지는 않았으나 깊은 밤 숲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귀곡 산장으로 초대되는 듯 섬뜩함이 밀려왔다. 좁은 외길 위로 빛나는 달빛은 또 얼마나 처연하던지.
늦은 시간에 도착한 탓에 다음 날을 약속하고 돌아서며 주인장 곁에 서있던 여인과 통성명을 하다 우린 함께 웃었다. 그녀는 자신을 써니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고 나 역시도 써니 엄마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처음 보는 사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써니가 있기 때문이리라
다음 날 계획된 무계획으로 남편은 책을 읽고 나는 오전 내내 꽃으로 잘 정돈된 숲 속 정원을 걸었다.
오후엔 문득 2 년째 장기 투숙을 하고 있다는 써니 엄마가 궁금했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간밤의 모습과는 달리 건강하고 더 젊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을 반색하며 마침 집안 청소를 하던 중이라고 했다. 나는 들고 간 커피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했고 그녀의 아들과 나의 둘째 딸 덕에 이야기를 쉽게 풀 수 있었다. 그녀는 건강이 안 좋아 찬물을 마시지 않는다며 냉수를 원하는 내게 미안함을 비친다. 사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쪽은 나였다. 그녀는 평소 사람을 접하는 것을 꺼린다고도 했다. 말을 시작하면 한꺼번에 토해내니 머리도 아프고 단어도 적절치 않은 것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더욱 조심한다고 했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이의 아픔이 내게 전해져 늦어진 점심 식사를 핑계로 자리를 떴다.
늘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맑은 하늘과 아침이면 찾아오는 새들의 합창과 멀지 않은 바다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탓 인지 하루하루가 마냥 편하고 즐거웠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멈추어 있는 듯싶었다. 지천에 펼쳐진 꽃 들도 우리를 위해 미소 짓고 새들 또한 밤새 준비한 듯 멀리서 때로는 아주 가까이에서 멋진 노래로 인사를 하며 우리의 아침을 깨우곤 했다.
너그럽고 꽃을 무척 사랑하시고 사람을 좋아하는 주인이신 정희 여사님 덕에 우린 푸른 밥상을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모기가 없는 한 여름 달빛 아래 개구리울음 소리를 벗하여 저녁을 먹고 차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장작불 아래 시를 읽고 그리스 신화 이야기도 들으며 마음을 나누는 날 들이 거듭되자 써니 엄마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지난 세월에 얹어 듣게 되었다. 이제는 우연히 찾게 된 이곳에서 건강도 많이 회복되고 용서도 배우고 타인과 떨어진 고독한 삶에서 자신이 치유가 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던가.
어느 날 저녁. 음악을 정원에 틀어 놓은 채로 집안으로 잠시 들어갔다 나오니 남편이 내게 말했다. 써니 엄마가 춤을 추더라고.
그날 밤 헤어지며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춤을 추었다고. 많은 날 동안 본인이 노래를 잘하고 얼마나 자주 웃고 춤을 잘 추었던 것을 잊고 살았는지 모른다고.
내가 그곳을 떠나던 날 친정 엄마가 다녀 간 것 같다고 이별을 아쉬워하며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춤을 추고 싶을 때 입으면 좋겠다며 정표를 남겨놓고 왔다. 꽃무늬가 있는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그녀가 행복해하며 푸른 제주의 밤과 낮에 빙글빙글 돌며 춤추며 웃고 사는 모습을 희망에 담아 본다.
우리는 모두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나도 당신도 그리고 써니 엄마도. 누군가는 조금 더 심하고 높게 치솟는 파도를 만날 뿐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자. 해결은 못하여 주더라도 들을 귀는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잡아 줄 손이 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자.
충분한 휴식과 추억의 보따리를 들고 돌아온 나는 그녀를 위해 잠시 마음을 모은다. 오늘도 바람은 지치지 많고 불어올 것이고 하늘엔 하얀 구름이 이야기 꽃을 피울 것이다. 어느새 그리움이 수북이 가슴에 쌓이는 오후 제주의 오름이 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