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안 계셔도 늘 제 안에 계시는 이여 평안하신지요?
뵙지 못한 채로 어느새 가을이 되었군요. 2020년의 봄은 참 이상한 계절의 시작이어서 다투어 산야를 수놓던 자연을 제대로 반기지 못하고 지나갔군요. 여름 또한 어두운 터널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들리던 매미의 노래로 여름이 끝나 감을 알게 되었지만 참 길고 지루한 봄과 여름을 보냈답니다.
여름과 겨울 사이의 계절 가을. 여름을 견디어낸 나무들이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단풍으로 물들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청명한 하늘은 힘들었던 지난날을 보상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하지만 아직도 가족과 공동체의 안전을 위하여 거리두기를 지키며 만남을 자제하라고 수시로 보내오는 주의 문자에 여전히 긴장하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아름다운 계절을 맞아 항공사도 이례적으로 폭탄세일을 한다는데 선뜻 여행 가방을 집어 들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마주 앉아 함께 나눌 소박한 우리들의 상차림을 떠올려봅니다. 햇곡식과 햇과일이 놓일 정갈한 상에는 가을을 품은 양념게장과 연근과 우엉 토란 고구마 줄거리로 올리겠어요. 그리고 조개를 넣어 우린 육수로 만든 순두부는 어떨까요. 가을 전어도 빼어 놓을 수 없겠지요.
도란도란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 시간 밥상을 지킬 겁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힘들기만 했던 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할 겁니다. 코로나를 통해 알게 된 인간의 욕심과 무절제와 부주의함과 배려 없음을 반성하겠지요. 그리고 조심스레 우리 가족에게 새 생명이 큰 선물로 다가왔다고 알릴 겁니다. 소심한 저는 소중한 보물을 누가 채어 갈까 봐 여름이 되도록 가슴에만 품고 있었노라고 그것은 참기 힘든 인내였다고 고백할 겁니다.
식사를 마치면 함께 집에서 조금 떨어진 산을 오르겠지요. 우리는 계단을 피해 발밑을 흐를 것만 같은 물의 속삭임을 들으며 부드럽게 휘어진 오솔길을 올라갈 겁니다. 그 시간 새들은 지저귀고 아직 지지 않은 유홍초가 반기겠지요. 숲길을 걸으며 자연이 내어주는 너그러움과 아름다움에 감격하며 낮게 노래도 부르겠지요.
그대가 백번을 들어도 좋다던 아그네스 발차의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되었네’를 준비하겠어요. 환하게 웃으시며 지중해를 떠올리는 당신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행복하군요. 연주가 끝난 후 차를 마시며 긴 여름을 이야기하다가 또다시 건강 이야기로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월의 강을 따라 흐르다 보니 무엇보다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임을 깨닫게 되더군요. 당신께선 언제나처럼 힘든 것 없었노라고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말씀하실 겁니다. 여느 때처럼 가끔은 인생에서 아픔이라는 것을 빨리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 하지 못해 힘들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해보라고 권하실 것도 압니다. 부부가 함께 춤추는 법을 알려면 평생이 걸린다지요. 모든 관계에서 인내가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보이는 것만 보지 말라고 말씀하여 주시니 왠지 힘이 납니다.
참 아름다운 계절이 곁에 있네요. 살면서 사나워진 눈길이 조금 부드러워진 듯한 오늘입니다. 향기로운 바람과 맑은 하늘 아래 피어난 길가의 코스모스와 구절초 맨드라미 칸나 백일홍을 보며 함께 보며 어릴 적 마당을 가득 채우던 그 꽃들 말입니다. 할머님을 모시고 모두 모여 한 상에서 식사를 하며 지내던 그날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 안이었습니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보이는 둥근 상위의 만남은 바깥세상의 사납고 욕심스러운 승냥이가 근접할 수 없는 세계였지요. 우리는 큰 사랑 안에서 그저 꿈꾸고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제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루한 봄.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높고 푸른 하늘과 황금빛 물결에 알곡이 여무는 경이로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연은 제게 예전처럼 꿈꾸며 포기하지 말고 힘차게 노래하며 아름다운 희망의 동산을 향해 함께 넘어가라고 손짓하는 듯합니다. 그 손짓을 향해 무작정 따라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딘가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희망을 찾아 뛰는 가슴으로 발을 옮겨야 합니다. 춥지만 따스한 겨울이 올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고 소중한 친구여, 기다림은 짧고 만남은 길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