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각은 오전 3시 45분 한 달 동란 익숙해있던 지구 반대편의 시간에서 벗어 나오려면 다시 새로운 시합을 위해 운동장에선 선수처럼 숨을 고르고 몸이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미 두 시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허기를 채웠으며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밖에선 이제야 일상이 시작되려는 듯 자동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여름을 아쉬워하며 떠나는 매미가 귀뚜라미와 함께 바람을 싣고 온다.
내가 이틀 전까지 머물던 곳의 시간은 오후 12시 45 분 일 것이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하얗게 피어나 산등성이를 감고 있을 도시의 친구 칼 (Karl)
칼은 안개의 이름이다. 많은 지혜를 지닌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신령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던 그이가 생각나고 그곳에선 늘 열린 창틈 사이로 끊임없이 불어오던 바다의 손길이 나를 잠에서 일으켜 세우곤 했다.
지난 시간 난 길 위에서 자유를 보았고 창조주의 위대한 계획을 보았으며 다정한 사람들의 미소 속에 어린 친절을 경험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 됨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온 시간이었다.
나 역시 한 때는 우리의 자녀들처럼 고민하고 아파했다. 늘 휴식릏 그리워했고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으로 갈증을 느끼는 시간이 많았다. 장밋빛 미래가 있기는 한 것인가. 내가 아는 그이가 정말 그이일까. 나는 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일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시간 나는 여전히 호흡하고 있다. 다소 건조해지고 탄력이 떨어진 나의 피부는 아마도 시간과 함께 날아간 잃어버린 꿈의 잔재이리라.
나의 딸들에게 또 그들의 자녀에게 깊이 있는 눈으로 사고하고 꿈꾸며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이며 보람 있는 일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하지만 삶의 길에서 체험하지 않고야 그 깊이를 어찌 알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고서야 어찌 깨달을 수 있을까. 실패도 아픔도 다 지나야 할 관문인 것을.
떠오르는 안개에 이름을 붙여주며 친근함을 보이는 그들의 마음에서 나는 나무와 다르지 않은 나를 보았고 작은 날갯짓을 하며 퍼덕이는 새에게서 또한 나를 보았다. 갖가지 색으로 서로 뽐내며 들판을 수놓는 들꽃도 나의 일부분이고 사막을 지키고 있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 또한 한 때 눈물 흘린 자인지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바다 같은 호수를 지나며 망망한 우주 속에 오늘도 숨 쉬며 때로 행복하고 슬퍼하는 우리의 모든 삶은 언젠가 안갯속에 사라지고 묻혀 버릴 것이고 떠난 자의 자리에 파도는 여전히 밀려오지 않겠는가.
행복을 섬세하게 느낄수록 행복할 일이 많아진다고 했으니 이번 여행을 통해 피부로 와닿던 자연의 숨결과 평생 변치 않을 가족과 지인들의 사랑. 더욱 성숙해진 젊은이들의 사고의 깊이와 삶에 대한 자세를 바라보며 느꼈던 순간들의 행복을 섬세하게 추억하며 아직 남아 있는 여름을 행복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파도에 실려 갈 그날을 준비하며 말이다.
여름에 피는 백일홍은 일곱 빛깔 무지개로 족두리를 쓰고 살아있는 동안 늘 웃고 행복해지라고 말한다
문득 오늘도 웃으며 산등성이로 피어오름 칼도 같은 말을 전해 줄 것 같다.
많이 웃으라고 그리고 행복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