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메이카

by 김인영


연말의 대학로는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맛 집을 찾아도 기다리라 했고 찻집에서도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평소 좋아하는 쌀국수를 입에 맞지 않는 곳에서 먹고 개운치 못한 기분을 업 시키고자 나온 김에 연극을 한편 보기로 했다. 근간에 가장 사람이 몰린다는 ~ 자메이카 헬스클럽. 극장 입구에 있는 포스터엔 당신의 살이 아닌 삶을 위한 힐링 다이어트 코미디라는 문구가 있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외모와 건강에 대한 관심과 염려증에 사로잡혀있는 우리나라엔 헬스클럽도 많다. 스트레스 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살며 분노 조절 장애로 고생하는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힐링 이란 단어는 또한 얼마나 달콤한 입안의 캔디인가. 힐링과 헬스는 같은 어원에서 왔다는 누군가의 말이 기억난다. 자메이카 헬스클럽이라는 제목에 강렬한 남미의 정서가 스며있는 내용 일거라고 상상하며 추운 날씨를 잠시 던져놓고 자리에 앉았다.

한때 잘 나가던 여성 모델이 슬럼프를 벗어나 재기하고자 옛 트레이너를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연극은 헬스장에서 힐링과 다이어트를 하며 과거의 오해를 이해로 바꾸고 새 출발하는 이야기가 주요 줄거리였다. 항상 웃는 밝고 당당한 듯 보이는 여인에게 감춰진 인생의 아픔. 헬스장의 관장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는 늘 잠겨져 있는 비밀의 방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하며 격리하여 놓고 보살피는 젊은 관장의 자존심이 숨어있었다. 이혼의 아픔으로 심신이 병들어 불어난 체중으로 오랜만에 보는 딸아이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자 살과의 전쟁을 시작하며 운동을 하는 마음 아픈 젊은 엄마. 재미있는 대사와 몸짓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우리네 삶의 현장에 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보며 눈에 보이는 것만이 모두가 아닌 것임을 깨우쳐주는 연극에 몰입하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관람이 끝난 후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가졌다고 말하고 2시간 전 만족스럽지 못했던 상황은 깨끗이 털어버렸다. 늘 편안한 모습으로 타인에게 비치는 나는 빗장을 지르고 누구에게 들킬세라 간직하고픈 남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마음의 방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메이카는 우리가 잘 아는 쿠바에서 멀지 않은 곳.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 밥 말리를 통해서 익숙한 레게음악도 자메이카의 산물이다. 노랑과 초록과 그리고 검정의 선명함으로 그려진 국기는 서인도 제도의 카리브해의 정서를 잘 나타내는 듯하다.

극이 끝나갈 즈음 어째서 헬스클럽의 이름이 자메이카냐고 묻는 여주인공에게 관장은 말한다. 한국에서 30 시간을 하늘을 날아야 갈 수 있는 나라. 그곳을 가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곳. 꿈으로만 가보는 아름다운 나라 자메이카. 비록 인생길의 아픔과 좌절을 피할 수 없지만 그래서 힘들지만 언젠가는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꿈 그리고 갈 수 있는 곳 자메이카. 그곳을 갈망하며 매일 꿈으로 문을 여는 헬스클럽. 자메이카. 극의 결말은 4명의 남녀가 각기 다른 이유로 찾아온 그곳에서 목적을 달성하고 홀가분한 모습으로 가볍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누군가는 꿈을 꾸는 여유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조금만 삶의 여유를 갖는다면 얼마나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는지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릴 적 빨강 구두가 갖고 싶다고 갈망하면 어느새 내 발에 얹혀있던 구두. 제복 입은 남자가 멋져 보인다고 했더니 젊은 청년을 군인 신분으로 만나 해로를 약속했다. 좁은 나라가 싫다고 먼 곳을 갈망했더니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큰 나라에서 살았다. 꿈이 무어냐고 물을 때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도 하고 교수가 되고도 싶다고 했더니 남편이 교직으로 은퇴를 했다. 돌이켜보니 엉뚱한 상상 그리고 통 큰 바람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늘 지니가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오늘 나의 자메이카는 무엇인가. 나를 지으신 분을 생각하고 자녀들을 위해 마음을 모으며 남편과 나의 건강을 감사함으로 뇌이고 나라와 형제와 자매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 세계평화가 이루어지어야 하고 누군가는 더 이상 부당한 대우로 눌리는 사람이 없이 존중받는 사회.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며 타인을 생각하고 혹시라도 내게 조금 나눌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마음과 여건을 바라는 것이 나의 꿈이다. 또한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부족한 글이 누군가에게 치유의 섬이 되어 그들이 위로를 받고 함께 비슷한 들숨과 날 숨의 깊이로 호흡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많이 감동하고 감동을 주는 삶. 내 삶의 나이테만큼 향기롭게 남은 삶을 아름답게 수놓고 싶다.

지금. 겨울은 춥지만 그곳의 붉은 태양과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차가운 현실을 물리쳐줄 것이다. 가고 싶은 곳 꼭 이루고 싶은 나의 자메이카.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이는 외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