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의 새 한 마리

by 김인영


오늘도 여전히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내 육신의 기지개를 켜게 만든다. 새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만 터를 잡는 존재는 아닌가 보다. 쉼 없이 거리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과 소음이 잦아드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리라. 어둠이 내리면 문을 단속하고 일찌감치 안으로 자리를 잡는 강 건너의 표정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지금 내가 잠시 머무는 곳은 뉴욕 맨해튼 레녹스 141가. 할렘이라 불리는 125가까지는 걸어서 산책할 만한 거리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이곳을 혼자 걷는 일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여기저기 교회가 보이고, 한 블록 안에 두어 개의 슈퍼가 있다. 생선 가게와 피자집, 빨래방이 이어진다. 예전에 유난히 많던 리커 스토어는 이제 눈에 띄지 않는다. 다섯 블록을 걸어 지하철을 타면 급행으로 펜스테이션에 닿는다.

그곳에는 코리아타운이 있다. 오늘은 그곳에서 떠나온 시간을 증명하듯 자라버린 머리를 다듬고, 적당한 양의 한국 음식을 들고 돌아왔다. 단군의 자손임을 다시 확인하듯 흐뭇한 저녁 식사로 포만감을 즐긴다. 이곳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종들이 각자의 모습을 숨기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들은 좀처럼 기죽지 않는다. 피부색이 검어도, 돈이 없어 보여도, 숨이 가빠 보일 만큼 뚱뚱해도 어찌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다. 그들 사이를 지나며, 다 괜찮으면서도 늘 주눅 들어 사는 우리를 떠올렸다. 잠시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다 문득 생각했다.
아, 그래서 환경과 문화가 중요한 것이구나. 이들에게 자기표현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밴 문화이자 습관일 것이다. 어쩌면 그 힘이 이 도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지도 모른다.

할렘의 길은 참으로 넓다. 그 넓은 길을 이어폰을 낀 젊은이는 소리치며 노래하고, 뚱뚱한 여인은 크고 화려한 모자를 쓰고 우아한 척 걷는다. 스타벅스 앞의 청년은 보라색 재킷에 핑크색 바지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 누군가를 기다린다. 어쩌면 그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청춘의 끓는 피를 억누르지 못한 무리는 모여 웃고 또래의 예쁜 것들을 희롱한다. 아이들은 브레이드 머리를 달랑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한여름인데도 쇼핑카트에 자신의 전 재산을 실은 듯한 나이 든 노인은 봉투에 감춘 술을 한 손에 들고, 두꺼운 코트를 입은 채 천천히 움직인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그에게 하루가 더 지난들 무엇이 더 안타까울까.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서운 형벌인 것을. 하지만 어찌 타인의 삶을 감히 논할 수 있겠는가. 어제 펼치던 삶의 보따리를 오늘도 밝은 태양 아래, 밤늦도록 다시 펼쳐 놓을 할렘 사람들이 곧 넓은 길을 가득 메울 것이다. 이곳을 기웃거리며 그들을 엿보는 재미에 잠시 머물렀으니, 이제 나도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다.

나도 할렘의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보리라.
기왕이면, 높이 그리고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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