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가 생겼어요

by 김인영

가보가 생기다.

늘 가훈이 갖고 싶었다. 한 집안을 상징하는 것. 그리고 딸들에게 본이 될 만한 그 무엇을 쥐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자신 있게 벽에 걸고 아이들은 물론 대대손손 마음에 새기며 살라고 권면하는 사자성어를 고르긴 쉽지 않았다. 의논하며 내어 놓은 생각들은 너무나 평범하여 차별화를 둘 수 없음에 실망하며 이럭저럭 세월만 흘려보내고 오늘에 이르렀다.

가끔 보는 텔레비전 프로 중에 ‘진품 명품’이란 시간이 있다. 어떠한 경로를 통해 소유하게 되었던지 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다양한 물건들을 갖고 나와 전문가에게 보이고 조상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간직해왔던 물건의 가격을 알아 가기도 하고 이제껏 진품이라고 알고 보관해왔던 것들에 때로 실망하여 돌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아무튼 조상 덕에 ‘가보’라는 것을 들고 오는 그분들이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세월의 벽을 넘어 새로운 빛으로 가치를 찾게 되는 낡은 골동품을 보며 내가 소유한 냥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나도 가훈을 넘어 가보가 생겼다. 남편이 10년에 걸쳐 수고한 보람으로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15명의 한학자들이 10년을 공들여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밤낮으로 책상을 지키더니 혼자의 힘으로 해냈다. 200년 전에 사셨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영어의 옷을 입혀 세계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에 어느덧 그의 모습도 변했다. 젊음의 탄력과 긴장감 대신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생겨났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시절 그에겐 세상에 맞서고, 예술에 향한 고단함과 통찰력이 예리하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아내를 만나 해로하느라 많이도 깎이어 예전의 모난 구석은 많이 사라졌다.

한땐 스스로가 셰익스피어가 환생한 것 아닌가 생각도 했다 하고, 꿈을 꾸어도 영어로 꾼다고 고백하여 나의 꿈처럼 흑백인지 아니면 총천연색이냐고 묻곤 했는데 아마도 우리에게 가보를 선사하기 위한 예시가 아니었는가 싶다.

어렵사이 끝내고 보낸 원고를 너무나 방대하다고 하여 10만 자를 덜어 내기도 하고 환경과 정서가 다른 외국인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느라 그들에게 맞는 정확한 묘사를 위해 하루 종일 단 3줄의 작업을 하고 돌아온 날은 참 안타깝기도 했다. 몇 년을 장시간 컴퓨터에 매달려 작업하느라 목에 디스크가 오고 엄지손가락의 통증으로 잠 못 드는 날은 큰 병이 난 줄 알고 병원으로 달려가 건강 검진을 받기도 했다.

누가 하라고 했던 것도 아니요, 보상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건만 그것이 자신의 방식으로 애국하는 것이라며 지치지 않고 긴 세월 달려온 것이 열매를 맺었으니 감사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체 66만 단어로 1170쪽에 달하는 영역 ‘목민심서’ 한 권이 태평양을 날아와 집에 도착하던 날 난 가보가 생겼음을 알고 감사했다.

이 한 권의 책이 우리의 가보이다. 남들은 탐내지 않을 지라도 남편의 노고와 애정과 젊음이 깃들고 긴 세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 이룬 업적이기에 더없이 소중하다. 1000도가 넘는 고열 속에서 땀 흘린 조선 시대 도공의 노고로 구워진 백 자기와 다를 바 없다.

영문으로 꽃 피운 그의 언어는 고려시대 비밀스러운 청자의 빛처럼 고귀한 색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깃든 선조의 넋을 담은 책으로 대대손손 우리의 자녀들을 통하여 이어졌으면 싶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자 하는 석학들이 도서관에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조선의 것에 대해 심취하여 배워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내 가족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니 더욱 귀하고 자랑스럽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먼 훗날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거든 이 책을 보고 기억하라고.‘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리 쓰시기도 했다.

‘지식인이 책을 펴내 세상에 전하려는 것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진가를 알아주기를 바라서이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관계할 바 없다. 만약 내 책을 정말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너희들은 그 사람이 나이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동년배라면 그와 결의형제라도 맺는 것이 좋으리라.’

다산을 통해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의 보물인 두 딸들이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를 아는 단 하나의 독자가 되어도 좋으리라. 아버지의 책을 이해하는 사람과는 평생 친구가 되어도 좋으리라.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무릎에 안고 할아버지의 삶의 발자취를 읽어주면 좋으리라. 또한 물질이 종교처럼 되어버린 세상에 우리가 버려선 안 되고 마지막까지 붙들어야만 하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우선순위를 높여 사람답게 사는 방법과 살면서 지켜야 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적은 이 한 권의 책을 수시로 읽고 타인을 배려하며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한몫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살라고 권하고 싶다.

남편의 책을 우리 집안의 가보로 정하여 조촐한 잔치를 하고 싶고,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애써주신 주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대한민국 최고의 가보를 지녔다고 스스로 자족하니 푸른 하늘이 온통 내 것인 듯하고 더위는 저만큼 물러가는 것이 보인다.

나도 드디어 가보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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